남한산성 장경사에서 토로하는 울분
강한집江漢集 제1권 / 시詩
장경사에서 묵다 을묘년〔宿長慶寺 乙卯〕
남한산성 지세 매우 험준해
등성 이은 백치 높이 성이라
가까스로 산속 절에 올라
밤새도록 피리 소리 듣네
황량한 성벽엔 고요한 자비 구름
싸늘한 초소엔 밝은 지혜 달빛
말 물먹이는 자들을 어찌 막으랴
적 깃발 펄럭임 참을 수 없었네
옛날 숭정 시대에
청해가 구원병 냈네
동쪽 강에선 북소리 진동하고
북쪽 항구엔 배가 늘어섰네
만리 길 군사 오기 어려워
하루아침 맹약이 이루줬네
충신은 분노로 배 찌르고
곧은 선비 다투며 글 찢네
능욕 당한 일도 서러운 마당에
맑아지는 황하 보지 못하네
법당엔 여직 한이 남았는데
성벽엔 새벽 기러기 울며가네
南漢極天險。連岡百雉城。聊登山上寺。終夜聽笳聲。荒堞慈雲靜。寒譙慧月明。何能防飮馬。不忍見懸旌。昔在崇禎世。靑海出援兵。東江金鼓振。北汛舳艫橫。萬里師難至。一朝盟已成。忠臣刎腹怒。貞士裂書爭。已傷丹極淪。未覩黃河淸。招提餘恨在。埤堄曉鴻鳴。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9
[주-D001] 장경사長慶寺 : 남한산성 안에 있는 절.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세웠다. 전국 팔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다고 하는데 이때 승군僧軍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주-D002] 을묘년 : 1735년(영조11). 강한의 나이 27세이다.
[주-D003] 백치百雉 : 치(雉)는 성벽의 높이와 길이의 단위로, 높이 1장丈, 길이 3장丈을 보통 1치로 친다.
[주-D004] 자비의 구름〔慈雲〕 : 넓게 파급되는 석가여래의 자심(慈心)이 마치 공중에 덮이는 구름과 같다고 하여 이른 말. 이곳이 절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했다.
[주-D005] 지혜의 달빛〔慧月〕 : 불교 용어로 중생의 번뇌를 깨우치는 지혜가 마치 청량한 달빛 같다고 하여 이른 말이다.
[주-D006] 숭정연간에 …… 때 :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명明 의종毅宗이 원군을 파견한 사실을 가리킨다. 남공철이 지은 〈판중추부사……황공 신도비명(判中樞府事……黃公神道碑銘)〉에 의하면 의종은 총병관 진홍범(陳弘範)에게 조서를 내려, 산동 여러 진의 수군을 통솔하여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황경원은 이 일을 거론하며 의종을 황단(皇壇)에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주청하여 실현하였다. 《금릉집金陵集 卷15》
[주-D007] 맹약 : 병자호란 후 청나라와 화친조약을 맺은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8] 충신들은 …… 찔렀고 : 이정웅李廷熊ㆍ송시영宋時榮ㆍ이시직李時稷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자호란 때 자결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9] 곧은 …… 찢었네 :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비국備局에서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겠다는 국서를 쓴 뒤 이를 수정하고 있을 때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는 입대(入對)하여 주벌을 청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때 김상헌의 말뜻이 절절하였고 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므로 입시한 제신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세자의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인조실록 15년 1월 18일》
[주-D010] 조정 : 원문의 ‘丹極’은 대궐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붉은색을 칠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11] 황하가 맑아지는 것 : 중국의 황하 강이 늘 흐려 맑을 때가 없다는 뜻으로,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12] 법당 : 원문의 초제(招提)는 범어(梵語) caturdeśa의 음역(音譯)으로,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1624년(인조2)에 남한산성 서문 안에 건립한 국청사(國淸寺)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4
황경원黃景源(1709 ~1787), 강한집江漢集 제1권 > 시
번역은 문맥을 고르게 하고자 많이 뜯어고쳤다.
저가 읊은 장경사는 남한산성 축조 동원 노가다 절 아홉곳 중 유일하게 남아 오늘에 이른다.
풍경이 수려하기 짝이 없으나 절간은 쇠락의 기미 완연하다.
자못 비장한 어조로 장경사에 서서 저런 감회가 가능한 원천은 무엇인가?
작자가 직접 경험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뭐가 있겠는가?
간접으로 체험한 후세가 더 격정적일 수밖에 없다.
식민지시대를 살지 않은 자들이 친일 반일이 어떻고 나불하면서 이랬어야 한다 저랬어야 한다 심판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