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識 2025. 9. 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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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호적은 시계열 자료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전국에 몇 군데 안된다. 

이 몇 군데 안되는 자료로 조선후기의 계급의 변동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이 나온다. 

하지만 이 지역들이 조선 전체를 반영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농업발전에 있어서 현재 호적이 남아 있는 곳이 

낙후되었던 지역이 아니라 이앙법이 도입되는 단계부터 수리시설의 증대까지 

당시 전국을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역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앙법 도입만 해도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빨랐다. 

이 17세기 부터 19세기까지 시계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뒤늦게 불붙은 장작이다. 

일본과 비교한다면 옆나라는 17-18세기 신나게 화폐경제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길을 달려갔음에 반해

이 시기 한국의 낙후는 뼈아프다. 

그리고 뒤늦에 불붙은 시기가 바로 19세기로, 

이 시기가 오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유학호를 단 양반이 되어버리는데 

이는 전적으로 정부가 양반에 대한 면세를 풀지 않았기 때문으로 

만약 18세기에 양반에 대한 면세가 철폐되었다면 양상은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갔을 것이며

양반의 수도 이렇게까지 급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 중세의 해체, 근대의 여명으 알리는 여러가지 신호는 
19세기 말 삼정문란으로 상징되는 극도의 혼란 속에 뒤섞여 나왔을 가능성이 많다. 

각설하고, 

이렇게 늦게 불붙은 장작은 20세기가 되어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들어 갔다. 

20세기의 한국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식민지 시대가 되겠는데, 

이 식민지 시대 역시 19세기에 뒤늦게 불붙은 장작의 입장에서 한번 보기를 권한다. 

19세기에 불붙었던 장작이 20세기가 되어서도 꺼지지 않고 

그 불길이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발전까지 그대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 하는 소리이다.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불붙은 장작을 발전의 동력으로 전혀 다루지 못하고 

그만 실화하여 집까지 다 태워먹은 격이라 하겠다. 

항상 역사를 통치하는 입장에서 보자니 우리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던가,

식민지수탈론의 시각을 낳는데, 

한 번은 이 뒤늦게 불붙었던 장작의 입장에서도 역사를 볼 필요 있지 않을까. 




*** [편집자주] ***


간단히 말해 망국이 아닌 관점에서 역사를 봐야 한다.

지배층 시각에서 보니 1910년이 망국이 된다.

망국이건 나발이건 그건 주인이 조선놈에서 일본놈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무덤덤의 역사학이 필요하다.

나한테 중요한 건 나라가 아니라 내가 등따시고 배부른가다.

이 시각으로 역사를 교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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