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이가 진보시키는 역사

조선의 역사는 노비 사역을 중심으로 한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는 잘 나가는 양반이 수백명 노비를 거느리고
농장이나 다름 없는 땅에서 농작물을 뿌리고 수확하는지라
대규모 경작이 대부분인지라 그 안에서 먹고 살 농산물이 대부분 생산되고
그러고 남는 건 선물의 형태로 있는 집끼리 서로 교환해 살았다.
그러다 보니 화폐가 돌 일도 없었고
시장도 있어봐야 뻔했다. 거기가서 사 올 물건도 없고,
팔 물건이 있어도 주변 사족들에게 선물로 주어 인심도 얻고
나중에 그에 해당하는 선물로 보답 받는 것이 모르는 사람하고 돈으로 거래하는 것보다
훨씬 남는 인간 관계인 것이다.
이런 상태가 대략 18세기 초반까지도 계속되어
동네마다 수백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사역시키는 양반들이 즐비한 것이 우리나라 사정이었다.
이런 판에 이 시절 우리나라에 상품화폐경제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뻥을 치거나 아니면 호적 한 번 제대로 안 본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니 각설하고-.
필자가 생각컨대 우리나라 지주-전호제 소위 소작제가 조선사회의 주류가 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뒤로 대략 18세기 중엽 이후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주-소작제 이전은 양반들이 노비를 직접 거느리고 농사를 짓거나
외거노비들에게 연공을 받는 초보적 소작제 비슷한 형태로 살림을 꾸렸을 것이라 보는데,
이러한 노비 사역 내지는 외거노비의 연공에 의한 시스템을 무너뜨린 것은
흔히 드라마 같은데 보면 도망 노비와 추노 같은 극적인 사건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양반들이 밥먹고 하는 일이 도망 노비 잡으러 다녔던 것은 맞지만,
이들이 정말 무서워 하고 노비 사역을 기반한 농장제를 무너뜨렸던 것은 도망노비와 추노가 아니라,
땡땡이였다.
노비를 사역하여 농사를 시키면 하루종일 시켜도 도대체 일이 진척이 안 되니
자기가 소유한 노비를 내보내고도 사람이 모자라 품을 사서 추가로 사람을 더 내보내도
하루종일 김을 매도 다 못매고 돌아왔다고 혀를 차는 기록이 쇄미록에 자주 보이니,
물론 일기를 쓴 이가 각박했던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필자는 그 일 시킨 노비가 하루종일 땡땡이 치다 들어온 탓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북한-.
하루종일 권력이 주도한 일을 나가서는 저마다 땡땡이치다 들어와 일이 마무리가 안되고 생산성이 떨어져
오늘날 저 모양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조선시대 노비사역과 농장제라는 앙샹레짐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노비들의 땡땡이였다 할 것이다.
아마 노비 사역과 농장제가 사실상 무너진 뒤에는 보나마나 그 자리를 지주-전호제, 병작반수의 소작이 대체했을 것임에 분명한데,
이렇게 성립한 소작제가 19세기 소농사회를 움직인 기본적 장치였을 것인데,
노비를 수백 거느리고 농장을 골머리를 앓으며 경영하던 양반들은 이 시기가 되면
지주가 되어 소작농한테 소작료나 받으며 살도록 전화되었을 것인 바
스스로는 아마 노비들 직접 농사일에 부리지 않아도 되니
속 시원하다고 하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