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퇴와 그 이웃-117] 무덤에 넣은 육류
마왕퇴 연재를 빨리 마무리 해야겠다.
이 연재가 마무리 되어야 단행본 집필 작업이 본격화할 것 같아서이다.
필자도 생업이 있는지라 퇴근후나 주말에만 집필하다 보니 어쩔수 없이 이야기가 종종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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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에 1호묘에서는 총 48개 대바구니 안에서 음식물이 담긴 것은 30여개가 발견되었다.
3호묘에서는 음식물이 담긴 대바구니가 모두 40개가 있었다고 한다.
모두 70개나 되는 음식물 바구니가 확인된 셈이다.
이 안에는 육류와 곡물, 과일 등 다양한 음식물이 들어갔는데, 기원전 2세기 중국 최정상급의 사람들이
어떤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엿볼수 있다.
그 중 육류를 먼저 살펴보면, 이 안에는 소, 양, 개, 돼지, 말, 토끼, 사슴 등의 육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금 (조류)도 발견되었지만 이는 다음 이야기로 따로 다루겠다.
마왕퇴에 들어간 육류를 보면 이미 이때 중원은 사육되는 가축으로부터 풍부한 단백질원을 공급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 개, 돼지, 말, 토끼 등 후대에도 주류를 차지하는 육류가 이미 마왕퇴 피장자들 밥상에 오르고 있었던 셈이다.
개고기는 초한쟁패기 유방의 오른팔 중 하나였던 번쾌가 원래 개백정이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지금은 개고기, 하면 한국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개를 이용한 음식이 먼저 발생한 곳이 한국땅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수렵채집 시기인 조몬문화기나 한반도 신석기시대에는
개를 그다지 많이 잡아 먹지 않았던 듯한 정황이 있다 (물론 전혀 안 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개가 확실히 식육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반도의 경우 농경이 확실히 자리 잡은 이후로 보이는데
일본 역시 야요이시대 이후에나 개를 잡아 먹기 시작했다고 하니
한국과 일본의 개 식육 전통이 보편화한 것은 농경의 본격적 시작과 궤를 같이 하는 듯하여,
이렇게 본다면 동아시아에서 농경의 확립이 가장 빠른 중국 쪽에서 개 식육은 먼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황하유역에서 소는 이미 용산문화기에 사육이 보편화했고,
말도 상대 이후에는 사육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소와 말 고기가 밥상에 오르는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한반도의 경우에는 기원전 2세기라면 소와 말이 남부지역에 이미 도입되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고
그 고기가 광범위하게 소비될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며,
일본의 경우에는 잘 알려진 대로 5세기나 되어야 소와 말 사육이 시작되니,
소와 말의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과 한국, 일본의 각각 격차가 매우 컸던 셈이 되겠다.
이 시기가 되면 야생동물이 사슴고기는 그 숫자가 상당히 감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은허 유적에서 나온 동물뼈도 야생동물이 상당히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상대 이후 서주,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동물 사육이 상당히 중국사회에 보편화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