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버리는 홍판서집 홍길동

흔히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홍판서를 떠나 멀리 가버리는 장면을 범상하게 보는데,
이 장면은 많은 부분을 시사하며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
첫째. 길동이는 얼자인데, 아버지를 아버지로 못 불렀다.
어머니가 평민으로 서자면, 여러 가지 불이익은 있지만 족보에도 올라가고 아들은 아들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천출인 얼자면 그것도 안된다.
양반 집에는 노비가 끝도 없이 있어 수백 명씩 호적에 편제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주인집 핏줄일 가능성이 있다.
흔히들 구한말에 성을 정하면서 노비들이 주인집 성을 따라 칭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아니고 그 사람들은 원래 그 집 혈족일 가능성이 있다.
천출이라 노비로 편제되어 있던 이들이 자기 아버지 성을 따라 간 것이다.
둘째, 길동이가 멀리 떠나려 하니, 홍판서가 호부호형을 허락한다.
서자라고 해서 그 아버지가 마냥 백안시 했을 것이라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국법이 엄해서 서자가 차별을 받을 뿐이지, 어쨌건 자기 아들 아닌가?
아버지가 서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그 집 본부인이나 적자 형들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앞 글에서 서자들이 멀리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는 대신 족보에는 서자 대신 적자로 남겨둔 정황이 꽤 보인다고 썼던 바,
어느날 세거지를 떠나 지방으로 낙향한 사족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처가집 도움을 받아 이주한 사족들이라 생각해선 곤란하다.
그 중에는 서자이면서도 이를 적당히 숨기고 새로운 고을로 들어가 정착하여 그 곳에서 사족으로 새 출발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새로운 고을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니, 서자 아닌 사족으로 출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조선시대 기록 보면 이런 경우로 의심스러운 곳이 제법 있다.
이들이 새로운 곳으로 가 정착하는 데는 틀림없이 그 아버지의 도움과 방조가 있었을 것이다.
세째, 홍길동이 아버지 곁을 떠나 멀리 가버리는 것.
아버지 곁을 떠나 멀리 가버리니
이제는 서자냐 아니냐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길동이는 원래 세거지를 벗어나 도둑놈도 되었다가,
거기서 성공 (!!) 하여 가라 병조판서도 되었다가 마침내 율도국으로 건너가 왕이 된다.
모든 서자의 꿈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 제대로 된 사족으로 재출발하는 것이었을 터-.
조선시대에는 세거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겨 정착한 수많은 사족들 이야기가 전해진다.
족보에 보면 그런 집안 부지기수다.
이들이 전부 처가집으로 건너가 새로 정착한 정실 자손들이라 생각하지 말 것.
그 중에는 서자가 상당수 섞여 있다.
원래 본가에서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겠지만
이미 멀리 떠나가 정착한 서자라 알고도 모른 척 할 뿐이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