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과 족보 이야기

모칭 유학은 어떻게 호적과 족보를 고쳤는가

신동훈 識 2026. 6. 8.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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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관련이 없음

 

흔히 조선시대에는 족보를 돈 주고 샀다던가, 

남의 족보에 이름이 끼어 들어갔다던가 하고 이야기들 하지만, 

족보에 대해 조금만 살펴 보면 이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족보와 호적은 한 몸으로 표리를 이룬다. 

족보는 호적을, 호적은 족보를 서로 지지하는 형국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바꾼다고 졸지에 그 동네에서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알다시피 조선시대에는 3년에 한 번 호적을 만들었는데, 

당사자가 호적 단자를 올리면 관에서 이를 받아 3년 전 호적과 대조하여 확인하고, 

새로 만든 호적을 3부 만들어 하나는 그 동네 관에서 보관하고, 한부는 관찰사, 한부는 중앙정부에서 각각 보관하였다. 

따라서 양반 족보 하나 산다고 내가 양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대로 족보는 내가 그 족보 산다고 훌러덩 그 집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족보는 이전 버전이 있기 때문에 새 족보를 만들 때 족보를 편집하는 이들은 이전 족보와 면밀하게 대조한다. 

이 과정에 매우 치밀하여 족보에 끼어 들어가기가 정말 쉽지 않다. 

필자가 조선시대 족보와 호적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족보가 됐든 호적이 됐든 이를 파고 들어 바꾸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족보나 호적이나 이를 원하는 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내부에 이를 바꿔주는데 도와주는 이가 있어야 가능하지 

내부의 동조자가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바로 족보와 호적의 변개다. 

아마도 호적의 경우에는 관청의 내부에, 

족보의 경우에는 내부 유사들 중에 이런 작업에 호응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를 매개하는 브로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족보 이야기가 이렇다. 

조선시대 족보는 정황상 수많은 변개가 있었고, 

또 위조, 날조도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아직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족보를 유심히 보다 보면 이것 이상하다. 

이것은 높은 확률로 나중에 불법적으로 끼어들거나 변개된 것 같지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들어온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호적과 족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하도 삼정문란에 족보는 엉터리라는 말을 하니 

제대로 관리도 안 되는 엉망진창으로 생각들 하게 되는데 실제로 공부해 보면 그렇지 않다.

족보와 호적도 나름의 룰을 가지고 제대로 운영되던 것들이었는데, 

이에 불법적으로 끼어 들어가려던 이들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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