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땅 털린 몽골 노용올 흉노무덤
흉노를 내가 논할 때면 매양 써먹는 사진이라
2009년 8월 14일
그쪽 행사 취재차 몽골을 찾은 김에 일행들과 더불어 몽골 쪽 안내를 쫄래쫄래 따라 가 실견한 노용올(노인울리) 흉노무덤 발굴현장이라
당시 저 무덤은 몽골 팀이 러시아팀과 공동조사를 벌여 이른바 매장주체부까지 노출한 상황이라 그 생생한 현장을 맛보았다는 기억으로 각인한다.
저 노용올 무덤은 이 업계선 아주 유명한 데라 일찍이 알려졌거니와
조심할 점은 몽골고원 흉노 흔적은 거의 예외 없이 후기 흉노 그것이라는 사실이어니와
우리가 생각하는 강성한 흉노, 곧 한 고조 유방을 개박살내고 여태후한테는 이젠 과부되었으니 나한테 시집오라 맘껏 조롱한 그 전기 흉노가 아니다.
저 강성한 흉노는 실상 그 주무대가 중원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곳이니 곧 고비 사막 이남 지금의 내몽골과 산서성 북부 일대를 호령한 실상 중원 왕조다.
이런 흉노를 일러 유목민족사를 집중으로 파고 드는 쟁재훈 선생은 전국8웅으로 호칭하는데 정곡을 찔렀다.
우야둥둥 저 노용올 흉노 떼무덤은 후한시대 비실비실 흉노라
이때가 되면 흉노는 실상 한 제국 부용으로 전락하고 그에 벗어나고자 한 일부가 고비사막 북쪽으로 도망쳐 명맥을 유지했으니 이 무덤들이 그 비실비실 흉노의 증언들이다.
현장에서 확인한 바 저들 무덤은 봉분이 있기는 하나 그리 높지는 아니해서 현재 남은 기준으로 1미터 안팎이 될까말까 한다.
대신 땅을 깊이깊이 파고들어가 나무 둥치들로 무덤방을 만들었으니 그 깊이는 대략 10미터 안팎이라 열라 깊었다.
묘광은 정사각형 가까운 모양으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파고 내려갔으니 저러다 매몰사고도 심심찮게 있었으리라 짐작하거니와
그리 깊게 파고 내려가려니 당연히 단을 지어 차츰 좁혀가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겠는가?
저리 파지 않으면 저런 무덤을 쓸 수 없다.
무덤 축조기술이라 매양 한국고고학이 뻘짓 일삼는데 저 딴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들로 연구라 하고 자빠진 데 지나지 않는다.
저리 깊이 파고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도굴 피해 우려 때문이라 어케든 그걸 막아볼 요량이었지만 저들 무덤은 파보면 예외없이 몽땅 도굴당했다.
근현대 소행일까?
천만에 당대 소행이었으니 저 비실비실 흉노는 이내 동호니 오환이니 하는 후발 유목 주자들한테 개박살나고선 영영 역사에 자최를 감추고 마는데
그때 모조리 저들한테 도굴당했다.
저때는 도굴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박장薄葬이었다.
하지만 말로만 떠들었을뿐 실천은 요원해서 언제나 바리바리 싸넣었다.
왜 박장은 사라지지 못했을까?
이 의문도 고고학이 해명해야 하지만 언제나 이 친구들은 뻘짓이라 무엇인가?
부의賦儀 때문이다.
박장을 이룩하려면 이 부의 문화를 개혁하고 이 또한 화폐 경제 본위로 가야 했지만 이 부의만큼은 요상하게도 물건 사여라는 질긴 전통을 고수했다.
부의로 내어 놓은 물건은 상주들이 쓸 수는 없다.
그 부의는 매장과 더불어 그 시신과 더불어 무덤으로 가야 했다.
물건 사여에 기반한 이 부의 문화가 없어지지 않는 한 무덤은 언제나 후장厚葬이었고 그 후장은 언제나 도굴꾼을 긁어모았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 찌께다시가 메인디시가 된 꼴이라 일단 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