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사민 (3) 만만한 소농, 하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 호적은 일부지역 것만
조선후기 약 200년 조금 넘게 남아 있다.
기간도 짧고 지역도 국한되어 있지만
남아 있는 곳은 식년 조사 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한 동네의 호적이 시계열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알 수 있어 한국사에 엄청난 자료가 된다.
이 자료를 보고 있으면, 한국사라는 것이 일제 강점기 한국사를 폄하하기 위해 나온 이야기 중에
소위 정체성론 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헛소리인지를 알게 되는바,
조선후기 한국사는 주변 나라들에 비해 뒤쳐졌던 것이지 정체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 늦게 변화가 시작되다 보니 결국 따라 잡지 못하고 식민지화 해버린 것인데,
18세기 중반 이후의 변화는 대단한 속도였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다.
각설하고,
조선후기 자료이기는 하지만 호적을 보면, 조선전기 사민 정책이 활발하던 시절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사민에 동원했을지 어렴풋이 짐작가는 부분이 있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시대가 다르기는 하지만,
사민하는 사람을 뽑아 동원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마을에서 사민에 충당해야 할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우선, 17세기까지만 해도 한 마을 사람의 대부분이 양반을 주호로 하여
그 아래에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노비가 한 집에 속해 있는지라
이 집은 나라 입장에서는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엄연히 사유재산에 해당하는 노비를 쪼개 보낼 수도 없고,
어느 집에 속한 노비를 보내도 될 정도로 그 주인집이 만만하지도 않다.
이들이 바로 그 고을의 향촌사족으로, 청금록과 향안 등을 장악하고
수령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라가 어떻게 변하건, 어떤 정책을 취하건
거의 변화 없이 안정적인 직역을 고수하며 수백명의 노비를 사역하여
수확을 거둬들이고 남는 것은 선물로 인근 지역의 사족들과 물품 교환하며
나름의 유족한 생활을 했던 것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사민을 뽑아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만만한 것이 결국 농사짓는 평민층이 될 터,
문제는 우리나라 17세기 호적만 봐도 생각보다 소농가구가 많지 않다는 데 있겠다.
오히려 농사는 대부분 양반에 속한 노비들이 지었으며,
소농들은 손바닥 만한 땅을 부치며 간신히 먹고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들은 무엇보다 영세하였을 뿐 아니라 19세기에 비하면 소농 가구 수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마을의 행정을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 농사짓는 평민층이야말로 그 동네에서 세금을 내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였겠다.
양반이 세금을 안 내고
그에 속한 노비들도 세금부과할 대상이 아니었으니,
결국 남은 것은 농사짓는 평민층이 조세부담층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들 소농호구수가 많지를 않으니
이들을 뽑아 많이 보내버리면 그 고을 세수가 절단 날 팔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