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대천不俱戴天한 혜석惠石 조동윤趙東潤(1871~1923)
미술사가 오주석(1956~2005) 선생의 <한국의 미 특강>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주석 선생이 간송미술관에 근무할 때, 채색된 난초 그림을 보았단다.
"무슨 난이 이렇게 기름지단 말인가?"
그러다 옆에 붙은 화제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단다.
그 주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그 '기름진 난'을 그린 이가 바로 혜석惠石 조동윤趙東潤(1871~1923)이다.
조동윤은 풍양조씨로, 그 유명한 신정왕후 조대비(1809~1890)가 고모할머니뻘이 된다.
그의 부친 혜인惠人 조영하(趙寧夏, 1845~1884)는 조대비의 5촌 조카로,
흥선대원군(1820~1898)과 친해 고종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0년 만에 대원군과 척을 지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예조판서였던 그는 친청파, '사대당'으로 몰려 살해당한다.
나이 열네 살 때 아버지를 그렇게 잃었다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일본과 '개화당' 세력은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여야 할 텐데,
조동윤이라는 사람에겐 꼭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1889년 과거에 급제한 뒤 총어영군사마, 육군법원 원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같은 고위 무관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시찰을 여러 차례 다녀오며 일본의 훈장도 받고, 일진회에도 가입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1919년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을 추진하고, 고종이 승하했을 때는 일본식으로 치러진 국장國葬의 부副제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때 일본 예복을 입고 고종의 상청喪廳 앞에 앉아있던 사진도 남아있다.
뭐 어쨌건 그런 사람이었던 조동윤이었다.
그는 서화에도 상당히 능했다고 하는데, 그의 난초 그림은 간송미술관에도 있고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도 있고, 개인 소장으로도 제법 전해진다.
이를 보면 그가 20세기 초 한국을 풍미한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 화풍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수준이 소호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화제畵題 말고 작품으로 된 글씨는 아직 두어 작품밖에 보지 못했다.
아래 글씨도 개중 하나다.
각진 부분이 없이 획이 상당히 부드럽다.
청나라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글씨를 배운 듯한 솜씨다.
이토록 유연한 글씨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니 과연 서화에 능했단 세평이 맞구나 싶다가도,
여백이 남아돌 만큼 작은 글씨 크기에다 획 변화가 적으니 심심한 걸 넘어 소심해보이기까지 한다.
이게 과연 무관의 글씨란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의 사람됨이란 저 정도였던가 보다.
그러니 김옥균(1851~1895)의 시신이 양화진에 널부러져있어도 찾아가보지 못한(않은) 것이려나.
쓴 시는 중국 당나라 시인 시견오(791~?)라는 분의 <숙사명산宿四明山>이다.
여주노인 나한데 더 자고 가라는데 黎洲老人命余宿
뜬구름과 나란한 높은 산 묘연하네 杳然高頂浮雲平
내려보니 몇천 길인지 모르겠는데 下視不知幾千仞
새벽인지 아닌지 하늘닭 우는구나 欲曉不曉天雞聲
받는 사람은 이와이岩井이라고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저기 작을 소小자를 붙여 코이와이小岩井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겠지 싶다.
만약 그랬다면, 일본 만화 <요츠바랑!> 주인공 요츠바 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에게 써준 글씨라고 우겨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