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필자 머리속 회곽묘 기억

필자는 요즘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연구 초창기 상당히 오랜 기간 고고학 지인 분들 도움을 얻어
발굴 현장을 누볐다.
이때 얻은 기억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이 시대 회곽묘에 대한 발굴 경험이 있는 분들은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18세기 이후 회곽묘가 이전과 달리 신분적으로 상대적으로 하위의 집단에도 확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곽묘 중에는 관 둘레에 회도 충실히 쓰지 못하고 간신히 회곽묘 흉내만 내어 놓은 것도 많아진다.
18세기 이후 회곽묘 상당수가 이렇다.
이 회곽묘는 필자 기억과 경험의 머릿속에서나 그렇게 팩트로만 존재하던 것이었는데
근래 호적과 일기를 공부하면서 이 무덤들이 과연 누구들 것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링크가 하나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조선후기 18세기 지나면, 우리나라에 노비의 숫자가 금갑하고,
양반 모칭자들이 급증하게 되는 바,
바로 이렇게 빈약한 회곽묘의 상당수는 바로 그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어쨌건 호적에 양반 직역이라도 받게 되었으니,
그에 걸맞는 방식으로 부모를 매장해야지
넉넉하지 않다고 해서 예전처럼 거적에 둘둘 말아 매장하겠는가?
산송이 벌어지는 투장 무덤들이 몰래 밤에 지게에 시신을 지고와 묻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팔지가 보기엔 이들 상당수는 양반모칭자로,
빈약하나마 회곽묘 모양은 갖추어 매장했을 것이다.
양반 무덤 옆에 투장한다고 해서 이들이 거적에 말아 몰래 옆에 구멍 파고 넣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나라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개발에 야산하나 발굴하면 그 산 전체가 무덤으로 가득한 것을 흔히 보는데
그 중에 상당수는 투장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