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사투리 쓴다 차별한 조선시대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9. 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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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7년 2월 24일 정시 전시 시권을 뽑는 자리의 대화이다.
영조가 이르기를,
“김한철金漢喆은 비록 서산瑞山에 살기는 해도 어찌 그를 시골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방 유생은 부賦나 표表가 서울 유생만 못한데 지금 책문에서 또 입격한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할 만하다.”
하니, 박문수가 아뢰기를,
“시골 유생의 문장에는 자연히 향음鄕音이 있으므로 표나 부에서 매번 낙방합니다. 이번에는 전시에서 대책對策을 만나 또 모두 낙방했으나 시골 유생들 사이에 억울하다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투리 쓰면 과거 합격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합격해도 어전에서 사투리 심하게 쓰면 시종신으로 쓰지도 않았다.
시골 양반 서울에 몇 년 유학하며 과거공부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지방 명문가들이 대체로 사투리를 적게 쓰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경연에서 언해본 음으로 읽으면 영조는 어째 그리 읽느냐고 묻고, 언해를 경상도 학자들이 해서 경상도 사투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고쳐 읽는 기사를 많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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