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산송이 급증한 이유
우리나라 산송이 늘어난 이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설명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 신분구조가 조선후기 들어오면서 격변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18세기부터 본격화하는 신분제도의 변화는
우리나라 묘제에서도 뚜렷하다.
조선시대 전-중기에는 양반들이나 쓰던 회곽묘가
후기 들어오면, 특히 18-19세기가 되면 그 아래로 확산되는 징후가 급증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첫째로 그 전까지는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던 노비가 점점 평민으로 풀려나고,
평민 중에서는 자신이 양반 직역을 받은 "양반 비스무리한 존재"로 되었다는 신분상승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부모 묘를 제대로 쓰려 하게 된다.
우리나라 임란 때까지 노비들은 죽은 후 어떻게 했는가를 보려면 쇄미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비들은 죽고나면 그냥 거적에 둘둘 말아 양지 바른 곳에 묻고 끝이다.
무덤? 없다.
이러던 것이 조선 후기들어 양반들에 사역되던 노비수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평민 중에는 양반 직역을 받아 19세기 들어오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학, 한량이 된다.
이들이 부모 죽고 나면 어떻게 하느냐.
전부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고자 한다.
그 이전까지는 무덤을 못 쓴 인구 절반이
이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18세기 이후 산송의 급증은 필자가 보기엔 이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남의 집 선산에 몰래 투장하다가
나중에는 발각되도 결사적으로 버티며 산송으로 간다.
심지어는 양반들이 투장한 무덤을 파버리면 산송으로 맞서며,
몰려와 주먹질을 하면 평민들도 함께 작당하여 같이 맞서며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19세기 양반들 일기에는 나온다.
산송은 양반들끼리 싸움도 있겠지만,
어차피 제대로 된 양반들끼리야 산송이 벌어질 까닭이 크지 않다.
자기 집 선산이 있는데 뭐하러 남의 집 선산에 갖다 묻겠는가.
산송이 늘어난 것은 양반과 양반모칭자의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