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서얼금고

우리나라의 서얼금고庶孼禁錮는 유별난 데가 있다.
이 서얼금고의 이유를 유교 때문,
혹은 태종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서얼을 몇 대가 지나도 대물림으로 몽땅 금고해버리는 짓은
어느 유교 경전에도 없는 일이고,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드문 일이며
더우기 태종은 그 스스로 서얼 금고를 명했다기보다,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금고의 전통을 재확인한 데 불과하다.
오히려 이전보다 태종의 금고는 그 정도가 완화된 측면이 있다는 점
요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서얼 금고가 집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이 되었는지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교나 태종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책임회피이고
서얼금고가 된 이유는 어떤 사회적 이유에서 계속 유지된 것임에 틀림없고,
이것은 왕의 명령이나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세속적 이유, 그리고 향촌 내재적 이유에서 말미암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같은 동족 집단 안에서 이른바 적류는
서얼 금고의 해제에 대해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서얼금고의 해제는 곧 재산 분배에서 어떤 식으로건 적류의 손해를 의미하며
과거 등 지배계급 사이의 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얼을 챙겨주는 것은 그래도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인지한
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것이지,
그 적류 형제가 챙겨준다?
그런 일은 왕가가 아니면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 보아도 좋겠다.
따지고 보면 정부에서 서자에 대한 입장은 언제나,
과거에 합격도 못하는 놈들이 놀고 먹으며 과거를 회피하는
이런 입장이었다고 보는 바,
과거에 합격도 못하는 놈들이란
결국 금고된 상태를 의미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고 먹으며
과거를 회피한다는 것은 곧
서류이면서도 양반 직역을 받아 군역을 면제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내내 발령하는 俗稱中人 또는 閑散方外에 대한 경계는
적류가 유교의 가르침과 왕의 명령에 가탁하여 서류를 견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가의 보도를 결국,
19세기가 되어서 새로 등장한 "모칭 유학"에 대해서도
조자룡 헌칼 쓰듯이 한 번 써보려는 것이 당시 양반 지배자들의 속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들 19세기 모칭 유학은 숱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밑바닥부터 기어오른 사람들이라 절대로 만만치 않았고
끝내는 궐기하여 중앙에서 보낸 정부군을 격파해 버렸으니,
그것이 바로 동학혁명의 1차 봉기였다 하겠다.
*** [편집자주] ***
계속 나오는 서얼금고庶孼禁錮라는 말은 아주 간단히 말해 서얼이라 해서 각종 차별을 가하는 일을 말한다.
서얼은 적통 적자에 대한 개념이라, 각종 차별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서얼로 그렇게 유명한 박제가는 후손이 자랑할 만하겠지만 내가 박제가 후손이라 해서 자랑스레 나서는 사람이 없다.
왜?
조상이 서얼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