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古의 일필휘지

[서예가 이완용] (1) 김은호가 기억하는 일당一堂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7. 2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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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평상심은 도道였는가 1>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 1858-1926) -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 일본제국의 조선귀족 후작侯爵 각하, 친청親淸에서 친미親美, 친로親露, 마지막 친일親日까지 자신의 정치행보를 끊임없이 바꾸어온 이. 

살아생전 온갖 권세는 다 누렸으나 천하의 매국노로 지금껏 지탄을 받는 사람. 

그는 살아서는 물론 죽고 나서도 사람들의 분노를 받아야했고, 깊은 산중에 자리했던 무덤마저도 파헤쳐졌다. 

천만영화 <파묘>의 모티브가 70년대 그 증손자가 벌인 이완용 부부 묘의 파묘였다니 지금까지도 이완용,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그나마 나은 수식어가 있다면 “명필”이다. 
 
이완용이 붓글씨를 잘 썼다는 것은 유명하다. 
 
대한제국 시기 그는 궁궐 현판과 상량문을 쓴 경험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곳에 비석, 현판글씨들을 남겼다. 
 
스스로도 자기 글씨에 자부심이 있었던지, 어지간히 글씨에 자신 없으면 쓰지 못한다는 <천자문千字文>까지 써서 발간했다. 

그가 ‘독립문’의 제액題額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는 것도 (그가 독립협회 창립발기인, 회장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런 점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라고 할 수 있는 서화미술회(서화협회) 창설에 깊이 간여했고, 회장과 고문을 맡기도 했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회고록 <서화백년書畫百年>에 따르면 이완용은 서화미술회에 드나들던 젊은 화가들에게 직접 글씨를 가르치기도 했다.

"서화미술회는 1911년 3월 22일에 문을 열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심이 흉흉하던 터라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이왕직과 손잡고 서화미술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합방에 공이 컸던 일당 이완용을 교장격인 회장 자리에 앉혀 놓았다. 일당은 매국노 소리를 듣던 때라 어디 가나 반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글씨도 잘 쓸 뿐 아니라 그림에도 취미가 있어 서화미술회에 나온 것이다. 한 마디로 취미도 살리고 말벗도 찾자는 의도였다. 
 
총독부는 총독부대로 그를 내세워 서화에 취미가 있는 선비, 소위 문화계 인사를 포섭하자는 내심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당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서화미술회에 나와 앉아 있다 가곤 했다. 
 
단아한 체구였지만 다부지게 생겼었다. 어떻게 보면 눈이 부리부리한 게 독하게도 보였다. 나와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4), 정재靜齋 오일영(吳一英, 1890~1960),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 등은 한동안 효자동의 일당 집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웠다. 
 
그는 우리들을 말동무로 불러들였다. 일당은 당시 귀족들 중에서는 가장 붓글씨를 잘 썼다. 그러나 일본 서도전람회 미술전에 출품했지만 입선도 못했다.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 1874~1951)과 함께 냈는데 성당과 해강만 입선했던 것이다."
- <서화백년> 중에서
 

글씨로 이름 높았던 만큼 이완용의 실제 작품도 같은 시기 어느 서가書家 못지않게 많이 남아있다.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 소장으로도 여러 폭 확인된다.
 
광복 이후 ‘매국노의 글씨’라 사람들이 많이 없앴을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인데, 최근에는 일본에서 역수입되는 경우가 많아 더 흔해졌다 한다. 

경매 같은 데서도 꾸준히 작품이 거래되고 있는데 대부분은 내리닫이 족자고 편액이나 소품 간찰류가 가끔 보인다.

하지만 그의 글씨가 한국 서예사의 맥락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리매김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그의 글씨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명필’이라거나 ‘명필이 아니다’라고 하는 분 자체가 드문 것 같다. 
 
대개는 덮어놓고 그의 글씨를 폄하하거나, 인상비평 수준에 머무르는 듯이 보인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글씨공부를 했는지 같은 기초적인 사실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그렇기에 이 글 자체도 인상비평 이상은 되지 못한다. 참고할 만한, 제대로 된 연구가 적기도 하고 필자 본인이 미술사를 전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완용의 글씨를 오며가며 여러 점 본 경험으로, 그리고 미술평론가 황정수 선생님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필적학자 구본진 변호사님의 <필적은 말한다> 같은 책에 기대어 그의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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