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아래 달빛을 밟은 운보 김기창과 청계 정종여
해방 전 어느 날, 이당 김은호(1892-1979) 문하인 운보 김기창(1913-2001)이 청전 이상범(1897-1972) 제자인 청계 정종여(1914-1984)와 자리를 함께했다.
스승은 달랐지만 그래도 퍽 가깝게 지냈던 듯싶다.
그 둘이 무슨 연유로 같이 만난 것이다.
이 시절엔 글 좀 하고 그림 그린다 하는 이들이 모이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어서 좌장이나 자리를 주선한 이에게 선사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그들 앞에 종이가 놓이자, 청계가 먼저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거친 듯 유연한 나무 둥치가 멋스러운데, 아래 공간이 비어 있다.
거기 운보가 신선과 동자를 세웠다.
누런 옷 노인은 저 멀리를 바라보는데, 청의동자는 화폭 바깥을 흘깃 쳐다본다.
다 되었다 싶었는지 청계가 다시 붓을 잡았다. 그리고 화제를 써내려간다.
송하보월松下步月
청계사노송靑谿寫老松
그리고 자기 도장을 꽝 찍었다. 전서체 글자 넉 자로 화폭 위에 달이 휘영청 뜬 셈이다.
운보는 마침 도장이 없었던지 운포화신선雲圃畵神仙이라고만 쓰고 말았다(글씨체로 보면 청계가 다 썼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보인다).
실컷 '운보'라 했는데 왜 '운포'인가? 원래 김기창 호는 '채마밭 포'를 쓰는 '운포'였다.
그러다 해방이 되니 '포' 네 변을 걷어냈다. 그래서 '운보'가 되었다 한다. 자연스레 이 작품의 연대도 짐작된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 둘은 각각 남에서, 북에서 인정받는 화가로 살았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평생 다시 만나진 못했다.
사람은 그렇게 가고 작품은 남아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화제를 가리면 합작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그림이 자연스럽다.
청계와 운보, 둘의 역량이 이 정도였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뮤지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