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

실제 향촌질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호적 (1)

신동훈 識 2026. 7. 1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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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산萬人傘에 적힌 조선후기 향촌 사람들. 이 사람들 대부분이 유학이라 적혔다.

 

조선시대 호적은 누가 뭐래도 그 시대 향촌 질서를 보여주는 일급 사료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료는 없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왕조 실록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호적은 향촌질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원하는 질서를 MSG 쳐서 만든 것인가. 

우리나라 조선시대 호적은 현재 시계열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 

경상도 쪽 몇몇 고을 문서로, 대략 17 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200여 년치가 남아 있는데, 

이 호적을 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는다. 

무엇보다 이 블로그에서도 여러 번 썼지만, 

17세기 중반은 물론 18세기 한참 지나서까지도 우리나라 향촌에서는 

자기집에 노비 수백 명을 거느리고 농사 짓던 양반이 즐비했다. 

그 노비 숫자에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고, 

그런 노비 경영 시대가 생각보다 훨씬 뒤까지 이어져 18세기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데서 굉장한 충격을 받는다. 

요즘 퇴계 이황 집에 노비가 많았다는 이야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노비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들 안다. 

그것을 아니까 추노 같은 드라마도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노비 사역 시스템이 무려 영조 시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굉장한 충격을 받고, 

그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첫 번째, 이 사실을 알고도 조선후기 역사를 그렇게 써서 대중에게 교육을 했는가 하는 학계에 대한 배신감이요, 

두번째는 혹시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호적을 제대로 안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필자 생각에는 우리나라 근대화 맹아론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호적 제대로 안보고 입론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걸 봤다면 절대로 그런 주장은 무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첫 번째 지적 충격이 이렇다면 

그 다음 충격은 18세기 중반까지도 이렇게 많았던 노비가 

19세기 중반까지 이르는 백년 사이에 정말 천지개벽하듯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19세기 중반 호적에 노비가 없는 것은 아닌데, 

향촌 사회에서 노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식년 호적을 따라 내려가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어 19세기 중반이 되면 한 집 건너 한 집에 유학이 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호적상으로는 이 시점이 되면 너나나나 전부 유학인 꼴로, 

이 시점에 나왔다는 만인소에 들어가 있는 유학들의 바다는 대략 보면 

유생들이 모여서 상소를 올린 위압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적어도 호적상 직역으로는 이 당시에는 동네에 널린 것이 유학으로, 

만인소에 이름 좀 적어 넣었다고 양반입네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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