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수포收布, 그 실패가 부른 파장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
양반이 군역을 지는 개혁이 완수되었으면
아마 19세기에 모든 사람이 유학으로 끝나는 모습은 보지 않읗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균역법 군포 대상자가 양반 직역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양반의 말단- 중인-부농까지 군포를 부과하고 선무군관을 부여하는 정도에 그쳐
결국 군역의 완전한 회피를 위해 양반의 상징인 유학의 모칭이 계속 되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유학을 칭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양반의 특권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한 것이
양반에 대한 모칭을 계속 불러왔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에 가장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서얼-중인-부농으로 구성된 집단인데
이들은 양반의 말단 내지는 중인, 부농으로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예 호적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균역법이 시행되면 선무군관으로 잡혀도 갔다가,
다시 유학을 칭하기도 하고,
족보도 사 모으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이들의 억척같은 생활력은 19세기가 되면 결국 빛을 보게 되니
이 시기에 과거 급제자, 심지어는 대과 급제자 중에도
이러한 유학 모칭자가 많았다는 것은 충분히 간취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이 전통적인 유림-반가와 결을 달리 했다는 것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등에서 익히 알 수 있는 바,
전국의 서원을 몽땅 쓸어 없애버리는,
16-17세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아마도 인조반정 같은 사건을 한 번 더 불러왔을 만한 일이 별 사건 없이 끝났다는 것은
이 시기에 이미 유림의 공론을 기반한 전통적 사족의 지배가 종식되고
당시 사회를 떠받치던 양반들은 이전과 결을 달리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필자가 보기엔, 서얼, 중인, 그리고 양반 모칭자들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