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용도불명의 목활자본: 열성수교 (2)
신동훈 識
2025. 7. 1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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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이 책의 퍼져 나간 시기로 알려진 18세기 말-19세기가 되면
이미 우리나라 향촌에는 동네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학"이 되어
양반이 되어 군역과 부역에서 빠지는 것이 일대 붐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렇다.
물론 18세기에 "유학"이 되어 군역에서 빠지는 경우가 있었겠지만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쉽게 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
그래도 비집고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자면,
우리 조상님 중에 성현이 계시다는 것으로 그 자손이니 우대해 달라고 청을 넣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 등에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논의가 가끔 보인다.
아래는 숙종 연간, 비변사 등록의 글이다.
都事의 考講案에 잡된 이유를 기록하는 것을 容認하지 못한다고 거듭 밝혀 통보하자는 備邊司의 啓
연월일
숙종 14년 1688년 01월 06일 (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양(江襄) 도사가 첩정(牒呈)으로 올려보낸, 본도 유·교생(儒校生)으로서 작년 가을의 고강(考講) 때에 도태시켜 군역(軍役)에 충정한 자 및 사고로 처리된 내용의 장부를 보니, 그 가운데 선현(先賢)의 후예, 대군(大君)의 후예 및 기자(箕子) 자손 한씨, 신라 경순왕 자손 김씨, 고려조 장절공(壯節公)의 자손 신씨로서 고강에서 면제시키고 사고 처리된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 일찍이 을묘년(숙종 1년 (1675))간에 고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胄)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에 탑전에서 아뢰기를 '선현의 후예로서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일찍이 조정에서 규례를 정한 내용을 들으면 비록 선현의 후예라 하더라도 칠반천역(七般賤役)註001) 외의 기·보병(騎步兵) 등 양역(良役)에는 모두 충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마다 모두 한가로이 놀려고 하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대왕 자손의 적파(嫡派)로서 충의위(忠義衛)에 편입이 되어야 할 자 외의 천서(賤庶)에 해당하는 부류도 6대(代)로서 한정(限定)을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군역에 보충하도록 이미 결정하였으니 다시 밝혀서 시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하니, 임금께서 말씀하기를 '아뢴대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조에서 사목을 만들어 기씨·한씨로서 기자의 후예라고 하는 자, 안씨로서 문성공(文成公)의 자손이라 하는 자, 설씨로서 홍유후(弘儒侯)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우씨로서 우좨주(禹祭酒)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문씨로서 문익점(文益漸)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신씨로서 장절공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명씨·진씨로서 고황제(高皇帝)의 명지(命旨)를 받았다고 사칭하는 자, 양씨로서 양백기(楊伯起)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공씨로서 멀리 선성(先聖)의 후예로 인정이 되는 자, 한씨로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자손이라 하는 자는 모두 군역에 보충하지 말도록 열거하여 각도에 통보하였습니다. 조정의 사목이 이와 같이 명백한데도 지방에서는 접어두고 시행치 않아 부정한 폐단이 과거와 같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또 이른바 대군의 후예라는 자가 만약 적파로서 충의위에 편입이 될 자라면 원래 거론할 것이 없으나 만약 천서(賤庶)의 파인 경우라면 이를 이유로 장부에 기록하며 사고로 핑계 대서는 옳지 않습니다. 본조 대왕의 자손도 대수를 제한하는데, 신라의 항복한 왕을 지금 거의 천년이 지난 뒤에도 그 자손의 역을 면제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그 외에 선현의 자손이라고 이유를 붙인 자는 다만 성씨만 있고 그 명자(名字)도 없으며 또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들 문제를 허위와 난잡한 대로 두고 그 기만하려는 꾀를 이루어지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다시 여러 도에 신칙하여 이러한 부류들을 일체 사목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의당할 듯합니다. 교생의 고강은 본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한 것으로서 도태시켜 군역에 보충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선현의 후예 등 여러 사람들은 비록 역에서 면제되어야 할 사람이지만 능히 글자를 알지 못하면 결코 교안(校案)에 함부로 기록하여 글을 읽지 않는 자가 숨어 있는 소굴(巢窟)로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강에서 낙방한 뒤에 혹 역을 정하는 데에 분간(分揀)할 수는 있으나 미리 한 장부를 작성하여 처음부터 강(講)에 들어가지 않게 함은 매우 극히 무리한 일입니다. 이는 곧 과거의 그릇된 예로서 도사가 어물어물 따르고 살피지 않은 결과인 듯합니다. 그러나 살피지 않은 채 드러나는 대로 책임을 묻는다면 뒤에 오는 자도 역시 이러하여 법령은 마침내 시행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도의 당해 도사를 우선 파직한 뒤에 추문하고, 앞으로는 도사의 고강안(考講案)에 과거와 같이 이러한 잡된 이유를 기록하는 것은 용인(容認)하지 못할 일로서 각 도의 도사에게 거듭 밝혀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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