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용도불명의 목활자본: 열성수교 (3)

신동훈 識 2025. 7. 1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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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에 이 열성수교라는 책은

특정시기, 특정 목적을 두고 편집되어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것 같다. 

단순히 문벌 집안의 시조를 추앙하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가 처음 이 책의 내용을 보았을 때, 

책 안에 기재된 역대 왕들의 교서가 혹시 위조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800년 전에 죽은 특정 문중의 시조를 추앙하여 그 후손을 모조리 군역에서 빼주라는 황당한 내용 탓에)

관련된 기록들을 몇 개 찾아보는 과정에서 이런 교서 자체는 확실히 발급된 것 같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이 책에는 신숭겸의 후손은 아무리 퇴락했더라도 군역과 잡역에서 빼주라는 교서를 여러 번 발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관련된 기록이 드물기는 하지만 사서에 산견되지 않는 것이 아니어서 

교서자체는 발급된 것 같지만 이를 발급했다고 해도 

조선정부로서는 이를 토대로 설마 이 문중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 아닌가 싶다. 

게다가 언젠가는 이런 교서가 사람들 기록에서 잊혀질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도 하지 않았나 싶은데 

문제는 신숭겸 문중이 이런 관련 내용을 악착 같이 기록해서 남기는 전력이 있다는 점이 되겠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도이장가"인데, 

우리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졌다는 고려시대 향가로 

지금도 교과서에서 배우고들 있겠지만

이 "도이장가悼二將歌"는 출전이 사서나 문집, 문선 등이 아니고, 

평산신씨 가승에 실린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라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나 사류들이 편찬한 일반적 사서가 아니라 

이 집안 족보에 실린 내용에서 기원한 셈인데, 

도이장가의 내용은 이 족보에 실려 있지 않으면 영영 잊혀질 운명의 글이었다 하겠다. 

도이장가 연혁에 대해서는 위에 소개한 장절공 유사라는 글에 이렇게 되어 있다.

(고려시대) 예종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金樂으로,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예종이 감격해서 한시와 함께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님을 온전케 하온/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넋이 가셨으되/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좋다, 두 공신이여/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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