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여흥민씨(驪興閔氏)
여흥민씨의 묘역이 조성되면서 만들어진 지명, ‘민재궁(閔梓宮)’
용인에 많은 세거성씨가 있지만,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성씨 중에 여흥민씨(驪興閔氏)를 손에 꼽을 수 있다.
용인의 민씨 세거지로는 처인구 유림동, 마평동, 포곡읍 신원리, 기흥구 공세동 등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데는 기흥구 상하동으로 추정된다.
상하동에 ‘민재궁(閔梓宮)[민자궁, 민제궁]’이란 지명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는 여흥민씨와 관련이 있다.
‘재궁(梓宮)’이란 시신을 안치할 때 쓰는 관을 의미한다. 즉, 민재궁이란 지명은 이 일대에 여흥민씨 가문 사람들의 묘가 조성되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런데 민재궁 지명 유래와 관련해서 여흥민씨가 아니라 풍창부부인 조씨(豊昌府夫人 趙氏, 1659~1741)의 묘소가 언급되곤 하는데, 풍양조씨인 풍창부부인이 어째서 여흥민씨와 관련이 있는 걸까?
이는 풍창부부인의 남편이 바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기 때문이다.
민유중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풍창부부인은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부부인의 작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영조 17년(1741년)에 풍창부부인이 돌아가자 영조는 선대의 일가이므로 은례(恩禮)를 두텁게 하였다고 한다.
“풍창 부부인(豐昌府夫人)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월름(月廩 : 월급으로 주는 곡식)을 3년 동안 기한하여 그대로 지급하도록 명하고, 또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보내어 돕도록 하였다. 임금이 선대의 척속(戚屬)에 은례(恩禮)를 매우 두텁게 하였었는데, 민씨(閔氏)에게는 더욱 후하게 하였다.”
- 『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3월 22일 정해년 -
풍창부부인의 묘소가 용인에 자리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이 일대가 여흥민씨 소유 또는 풍양조씨 소유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풍창부부인의 묘가 들어선 이후 여흥민씨 일가 여럿의 묘가 조성된 것으로 보아 여흥민씨 소유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여흥민씨세보에 의하면 풍창부부인의 아들 민진영(閔鎭永, 1682~1724)의 묘가 용인현 수원동에 있다고 하였는데, 풍창부부인묘 좌록(左麓)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수원동은 민재궁 일원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또한 풍창부부인 조씨 묘와 멀지 않은 위치에 조선후기 문신 민승호(閔升鎬, 1830~1874)의 묘가 자리한다.
민승호는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아들로 민치록(閔致祿, 1799~1858)에게 입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오빠가 된다.
여동생이 왕비에 책봉되자 중용되어 흥선대원군 실각과 함께 국정 전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1874년 폭탄이 장치된 소포의 폭발로 일가와 함께 폭사(爆死)하였다.
민승호의 묘는 처음에는 서울에 안장되었다가 1898년 용인 수원동으로 이장하였다.
이처럼 풍창부부인 조씨 묘소가 자리한 이후부터 용인 상하동 일원에 여흥민씨 일가의 묘소가 많이 안장되었고, 그로 인해 이 일대가 ‘민재궁’이라고 지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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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과 충정공 민영환
용인과 관련된 여흥민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민영환(閔泳渙)이 있다.
민영환은 18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조판서 민겸호인데, 민겸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민승호의 동생이다.
민영환은 서울 출생이지만 부모님의 선영이 용인에 있어 자주 용인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고종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민영환은 자주 용인의 선영으로 성묘나 제사를 위해 자리를 비우고자 고종의 허락을 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기록에 나오는 용인 선영이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조선후기부터 여흥민씨 묘역이 조성된 민재궁 마을 일대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병조 판서 민영환(閔泳煥)과 설서 민영찬(閔泳瓚)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의 선영이 경기 용인(龍仁)에 있는데, 해가 바뀌고 봄이 되어 비와 이슬이 내리니 선영이 눈앞에 선하여 슬픈 마음이 갑절이나 일어납니다. 신 영찬이 작년 겨울 과거에 급제하던 날, 우리 전하께서는 선신(先臣)을 추념하셔서 특별히 명을 내리시어 국립 악대의 인도로 영광스럽게 거리를 누비게 하였습니다.
어사화(御史花)를 쓰고서 돌아다니는 유가(遊街)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시강(侍講)의 직임을 곧장 맡기시니, 이는 참으로 옛날에는 없었던 특별한 대우이고 지극한 영광입니다. 아득한 구천(九泉)에서도 듣고 감격할 듯한데, 하물며 신의 마음에 칭송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현재와 과거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건대 끊임없이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이런 영광된 은총을 받고 삼가 선영에 고하는 것은 신이 정리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만, 연이어 경사가 있어 신의 개인적인 사정을 말씀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신 영환이 맡고 있는 병조 판서의 직임 및 임시로 겸찰하는 직임과 신 영찬이 띠고 있는 궁함(宮銜)은 모두 마음대로 자리를 떠날 수 없고 말미를 청하여 고향을 찾는 것도 전식(典式)에 허락하지 않는 사항입니다. 오직 지금 윤허를 받아 모든 직임을 사직하고 형제가 함께 가서 성묘할 수 있게 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들의 지극히 간절한 뜻을 굽어살피시어 빨리 신들의 사직을 윤허하시고, 이어 은혜로운 여가를 주시기를 천만 번 축원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들은 사직하지 말고 편리한 대로 가서 성묘하도록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27년 경인(1890) 2월 28일(무술) 비 -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민영환은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민영환은 순국 후 용인에 묘가 조성되었는데, 아마도 선영이 용인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장지(葬地)를 용인군(龍仁郡)에 새로 정하였다고 하니 내부(內部)에서 경계를 정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2월 4일 양력 3번째기사(1905년 대한 광무 9년) -
민영환은 순국 후 일제강점기 내내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 토월마을에 봉분없이 평장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명으로 지금의 위치인 기흥구 마북동으로 이장되었으며, 1973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