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원(驛院) : 보수원(寶樹院)의 실체를 확인하다
조선시대 용인에는 2개의 역驛과 3개의 원院이 있었다.
(역은 사신이나 관리가 왕래할 때 마필을 공급하던 곳이고, 원은 공공 숙박시설, 즉 여관을 의미한다.)
1. 구흥역駒興驛 : 현의 남쪽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2. 금령역金嶺驛 : 현의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구흥역과 30리 간격을 두고 있었다.
(18세기 제작된 해동지도에 따르면, 구흥역에는 말이 10필, 금령역에는 말이 5필이라고 하여, 구흥역의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1. 보시원普施院 : 현의 서쪽에 있다.
2. 홍화원弘化院 : 현의 남쪽에 있다.
3. 금령원金嶺院 : 금령역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중 '보시원'은 서변면에 위치했는데, 지금의 보정동 연원마을 부근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없지만, 이곳에 연꽃과 나무들이 많은 까닭에 연원蓮院마을이 되었다고 하며, 보시원의 이름도 '보수원寶樹院'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옛 용인현 중심지인 구성 지역 구성초등학교 운동장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寶樹院造[보수원조]'란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아직까지 보수원이 있던 연원마을 부근에서는 기와가마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보수원에서 기와를 생산했다기보다,
보수원에서 사용할 기와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보수원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여지도서를 포함하여 이후 편찬되는 지리지나 지도에서는 보시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보시원은 조선 후기에 폐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광무 5년(1901년)에 쓰여진 가옥문기家屋文記에서도 '보수원'이란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문)
大韓光武五年辛丑十月二十日李順道前明文
右明文事段無他以移買次伏在龍仁西邊
面寶樹院店幕草家六間半價折錢文壹
仟兩依數交易是遣舊文記本無所存故此新文
記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是非之端此
文記告 官呈者
家主金景信(手決)
證人金伊完(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