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부분은 유학모칭자의 후예이다
조선후기사에서 유학모칭자의 풀은 아주 다양한데
19세기가 되면 이 다양한 백그라운드의 사람들이 유학모칭자의 거대한 저수지에 다 모여들었다.
원래 지배계급인 양반들이 볼 때 유학모칭자, 한산자閑散者, 놀고 먹는 이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7세기만 해도 양반의 하위그룹,
서얼층이 대부분이었다.
서얼은 홍길동처럼 내가 서얼이면 끝이 아니고,
그 위로 몇 대 조인지 모를 조상이 서얼이면 그 아래 후손들이 통채로 금고가 되는지라
향촌에서 이들이 한산자 그룹을 형성했고
정부에서 유학모칭자라고 부르면 대개 이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정부 눈치를 보다가 될 거 같으면 유학을 칭하다가도
호적이 빡세질 것 같으면 업유, 업무를 칭하기도 했는데
어느 쪽이건 간에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자칭타칭 양반의 아래 끝머리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들은 조금만 정부의 정책이 빡세지면 여지 없이 유학에서 쫒겨나
심지어는 선무군관으로 불려가 군포를 납부하기도 했으므로
이들이 "유학모칭자"의 1세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되어 있던 유학모칭자 그룹은 기껏해 봐야 서얼 후손 정도로 그 숫자가 많지 않았는데
18세기부터 점점 증가하더니
19세기가 되면 전 인구의 70프로가 넘는 사람들이 유학이 되버렸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19세기에 "유학모칭자"라고 하면 바로 이 그룹을 이야기 하는데
17세기 초반만 해도 양반이 전체 인구의 10프로가 안 되고,
노비 인구가 절반 가까이 되었던 나라에서
19세기 중엽에 유학을 모칭한다는 사람들이 70-80프로까지 늘었다면 이들은 다 무슨 출신이겠는가?
평민 아니면 노비출신도 있을 것이고,
이들은 원래 양반이었던 적이 없으니 이들을 "잔반"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따라서 19세기의 유학 모칭자들은 농민도 아니고 잔반도 아니고 서얼도 아닌,
그야말로 19세기 이전에는 잡다한 출신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힘이 상승하면서 집단적으로 유학을 모칭하기 시작한 것인데,
바로 이들을 빼고 나면 19세기 말 동학혁명을 주도할 만한 세력이 우리나라에는 없다.
따라서 2025년 현재,
한국인 대부분은 19세기 중 후반의 유학모칭자들의 후손이다.
이 유학모칭자들이야말로 현대 한국 중산층의 기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동학혁명이 농민혁명?
동학혁명은 한국중산층 혁명의 제1 신호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