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이른바 유학모칭론을 비판한다 (2)

신동훈 識 2025. 8. 30. 19:35
반응형
국립조세박물관 소장품인데 그에 대한 박물관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호구단자(戶口單子) 작성연대 : 1894년 - 발급자 : 임작(任昨) - 수취자 : 보성군(寶城郡) 1894년(高宗30, 甲午)에 백야면(白也面) 은선정(隱仙亭)에 거주하는 임작이 호(戶)내 인구현황을 기록하여 보성군에 제출하는 호구단자. 전 호적까지 “유학(幼學)”을 기록하던 임작은 이 문서에서는 직역(職役)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행(行)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기재하였다. 통훈대부는 정삼품(正三品)의 품계로, 처 양씨(楊氏)는 남편의 품계에 따라 외명부의 품계인 “숙인(淑人)”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사헌부감찰은 중앙의 각 관서나 지방에 파견되어 감독기능을 수행하던 직책으로 정6품에 해당한다. 실직이 품계보다 낮으므로 품계와 실직사이에 “행(行)”을 기록하였다. 관원예비자로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이라는 의미의 ‘유학’에서 3년 만에 갑작스레 고위직을 얻었다. 이러한 직역기록이 변화는 조선말기 호적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모칭(冒稱), 모록(冒錄) 현상의 일환으로 보이나, 다른 자료가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시각은 필자도 

16-17세기라면 타당하다고 본다. 

이 시기에는 필자 생각에도 만약 양반이 아닌데 유학을 참칭했다면

유림의 공론에 의해 유학에서 퇴출되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에는 호적에 유학이라고 올려놔도 퇴출되지 않았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학인 상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누구도 저 놈은 유학도 아니니 빼버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일까? 

19세기가 되면 이른바 유림의 공론이란 

쑥덕거림 이상의 의미는 더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조선사회의 정점에는 전통적인 명가들이 계속 집권해 있었고 

유림의 공론의 여진이 계속 남아 있긴 해지만, 

유림의 공론으로 유학이라 호적에 올린 이를 

맘대로 쫒아내지 못하는 여건이 이미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대원군 집정후 전국에 천여 개나 되었다는 서원을 

일거에 밀어버리고,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호포라는 이름으로 부과해도 

찍소리 못하고 받은 것이다. 

유림의 공론이란 19세기가 되면

이전에 평민 혹은 심지어 노비였던 이들이 신분 상승하여 

호적에 유학이라 올려도 

쑥덕거림 이상의 제재는 더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19세기의 유학은 "유학을 모칭한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합법적 "유학幼學"이며, 

"양반"이다.

양반을 군역에서 빠지고,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들은 양반이다. 

19세기 들어 유학으로 호적에 오른 사람들은 

이전의 양반들처럼 군포를 면제받았고

과거에도 응시하여 심지어는 대과 급제자까지 나왔다는 것은 이미 잘 밝혀진 사실이다. 

19세기의 유학의 수가 급증했다고 해서

이들을 "유학모칭자"라 폄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17세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유학이 급증한 것은 

신분해방을 위해 싸워온 한국인의 지난한 투쟁의 결과이다. 

그 결과물이 19세기 호적에서 볼 수 있는 유학호의 급증이다. 

이 수가 불었다고 해서 수다스러운 양반들의 질투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만약 이들의 유학호가 정말 불법적이었다면, 

이전 시대에 그렇듯이 양반들이 새로운 유학호의 호주에게 쳐들어가 상투를 잡아 을렀을 것이며 

이들은 유학에서 쫒겨나 호적에서도 지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양반들이 아무리 질투하고 

저놈들은 양반도 아닌 놈들이라고 떠들어봐야

그것은 이미 뒷공론 이상의 의미는 갖지 않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필자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한국에서 19세기-. 

"유학모칭자"는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합법적 유학"이며, 

합법적이므로 군역에서 자유로워졌고, 

과거시험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합법적으로 유학이 되어 자기 권리를 행사한다는데 

감히 유림의 공론을 어떻게 들이댈 수 있겠는가? 

유림의 공론 따위가 19세기의 이 물결을 막을 수 있었다면

유학호의 수는 더 이상 늘지 않고 줄어들었을 것이로되, 

그 흐름은 오히려 더 강고해져가기만 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세기 유학호의 증가는 

당연히 양반 호구의 증가이다.

이를 폄하할 이유가 전혀 없고, 

그것이 특히 19세기 중반,

대원군집정기가 되면 이미 상갓집 개 이상의 힘을 갖지 못하고 퇴락해 버린

"유림의 공론"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19세기 중반에 무슨 유림의 공론이 있나. 

그런 것이 있다면 아마 서원을 철폐하고자 했을 때

반정이 일어났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