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향사, 조선의 향촌 중인

일본 에도시대에는 향사鄕士라는 계급이 존재했다.
이 계급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
사무라이 계급은 맞지만 제대로 된 고급 사무라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시가루 같은 밑바닥 사무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급사무라이들한테서 멸시 받는 그런 존재로,
모든 번에 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많이 존재하는 번이 있고 또 그 이름도 향사외에 다양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
이들은 칼을 차고 성을 썼기 때문에 사무라이는 맞지만
영 시원치 않게 취급되었는데,
대개 그 출신이 농민 겸업이다가 그 우족이 사무라이로 올라가거나,
전국시대 사무라이였던 후손들이 세키가하라 때 패하여
에도막부 치하에서 사무라이 이름은 붙여놔도 천시받는 하류 사무라이가 된 것으로,
대개 시골 사무라이 중에 격이 떨어지는 이들-. 이런 정도의 인식이 가능하다.
아시다시피 메이지 유신 때 이들이 대거 탈번하여
막부타도에 앞장선 관계로 유신 이후에는 집안이 영달하여
귀족으로 올라간 이도 많다.
지금 일본 정계를 주름잡는 벌족 정치가 중에는
바로 이런 향사 출신이 꽤 있다.
이들은 사무라이 출신임을 자임하지만,
실제로는 향사 출신으로 에도시대 당시에는 천대받던 사무라이들이다.

이에 딱맞는 계층을 조선에서 고르라면,
우리나라 임란 이후 조선후기,
17-18세기를 보면,
각 동네마다 양반은 양반인데 뭐 하나씩 빠진 것 같은 부류들이 있으니
이들은 호적에는 양반 직역을 받아 운 좋으면 유학, 운 나쁘면 업무, 업유 등을 받고 있지만,
나라가 빡세게 호적을 운영했다 하면 예를 들어 균역법이라도 시행할라 치면,
첫 순위로 선무군관에 임명되어 버리는 그런 수준-.
이런 사람들이 각 향촌에 꽤 존재했다.
학계에서 소위 향촌 중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로
양반 지손 중 한미함이 극에 달하여 잔반화하거나,
서자 출신들.
이런 사람들이 대개 향촌의 양반 직역 바닥층인
향촌 중인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다른 중인들처럼 중인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양반처럼 행동하고 과거도 봐서 무과 정도는 가끔씩 급제하여 방목에도 이름을 올리지만,
그래도 양반으로서의 지위가 조선 후기 내내 위태로운 그런 계급의 사람들이니
이들이 우리 학계에서 말하는 바, 소위 조선 후기의 "잔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되겠다.
이들이 그러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메이지유신" 시대에 해당한다고 할 만한 바로 그 시절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아마도 메이지유신기 향사들처럼 정권타도를 외치며 치닫던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구한말 개항 이후 새로운 국면에서 출세 지향 움직임을 보이던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인 바,
이들이 행동에 대해서는
이른바 "민중사관"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이들을 "농민" 혹은 "민중"으로 파악해 버리고,
또 다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이들을 "모칭유학"으로 보아 무슨 반사기꾼 보듯 하니
이들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 향촌중인 내지는 잔반, 양반 끄트머리에 속한 사람 중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크게 집안이 일어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문들 중에도
스스로는 벌족으로 누대 양반으로 포장하지
향촌중인, 잔반, 양반 끄트머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예외적 존재를 빼고는 없다는 것이 되겠다.
이렇게 집안을 포장하다 보니
구한말의 격변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방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