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대학진학에서 고등학교가 왜 중요했는가?
일제시대라고 해서 대학진학자가 백프로 중학교-고등학교 경로를 거친 것은 아니다.
확률은 많이 낮지만 조선인 중에도 소위 "천재"라는 이들은 이 높은 문턱을 뚫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고보 출신 중에도 경성제대 예과에 합격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조선천지의 천재들이다.
그렇다면 왜 일제시대,
대학진학에 있어서 고등학교에 우선 입학하는 것이 중요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일제시대의 고등학교나 대학예과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지금 의예과를 연상하면 된다.
다들 알다시피 의대 본과 진입 전에는 예과 2년을 거치게 되는데
이 의대 예과 2년이 바로 일제시대의 고등학교, 혹은 대학예과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입학이 되어 있어야 유리했던 이유는
고등학교 정원과 대학 정원이 거의 1 대 1로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예과를 들어오면 특별한 사정 없이는 본과로 다 들어가는 것처럼
일제시대에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특별한 상황 아니면 거의가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졸업생을 우선적으로 대학에서 뽑은 데다가,
정원이 1대 1이라 경쟁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고등학교-대학이라는 이 코스를 밟지 못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가기란
여석이 생기지 않는한 거의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일제시대에 한국에 고등학교가 없다 보니
고보 졸업생에게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선택지가 몇 개 없었다.
첫째는 조선의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경성의전, 연전, 보전, 이화여전 등이 그런 것인데
고등학교가 없다 보니 이런 전문학교 입학도 경쟁률이 아주 높았다.
여기만 해도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둘째는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렇게 건너가면 조선의 교육제도는 당시 일본과 달랐으므로
일본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과조치로
예비학교를 모두 다니며 여석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몇몇 사립대 출신이라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분들 중에는 실제로 이 몇 안 되는 좁은 여석을 뚫고 들어가
졸업한 분들도 있지만 (이병도 같은 양반이 대표적)
대부분은 대학 예비학교를 몇 년 머물다
결국 그 벽을 넘지 못하고 귀국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실제로 일제시대 기록을 보면
유명한 일본 사립대의 조선인 유학생 모임을 나가보면
정식 학부생보다 예비교생이 거의 전부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