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공공성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던 임란 의병들

신동훈 識 2025. 12. 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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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의병에 붙은 의병이라는 말은 

이 의거에 참여한 분들에 대한 예찬과는 별개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제점이 그 안에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먹고 사는데 관련하여 누리고 있는데 대해  

국가에 반대급부로 내야 할 군역의 의무가 전혀 없었다. 

예를 들어 일본을 보면, 

무가의 시대,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땅을 주어 먹고 살게 하면

반대급부로 그는 유사시 반드시 일정 병력을 끌고 참전해야만 했다. 

에도시대에도 평화가 장기가 지속되었지만, 

고급무사에서 하급무사까지 유사시 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군역을 전제로 그들에게 땅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반이 되면 군역을 모조리 빠져버려 

국가에 대해 해야 할 의무는 사대부라면 사실상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국가 누란의 위기라 할 임란이 닥쳐도

향촌 지주인 사대부들이 결연하게 병력을 이끌고 나가도

이건 자신이 누린데 대한 의무의 수행이 아니라 

안 해도 되지만 유교적 의무감에 바탕한 "의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쇄미록을 보면, 분명히 땅을 가지고 먹고산 지주-양반들이 

임란이라는 위기 국면에서 전혀 하는 일 없이 오로지 먹고 살 걱정에 올인하는 모습을 본다. 

이 정도 땅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러한 군사적 위기상황이라면

일본의 경우 군역이 당연히 부과되었을 텐데 말이다. 

조선이 오백년 내내 빌빌거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실상 향촌의 땅이란 땅, 농민이란 농민은 노비로 다 점유하고 있었던 양반들이 

군역을 전혀 지지 않는다는 이 문제가 가장 크고 뼈아픈 문제였다. 

조선의 모든 문제는 이로부터 나왔고, 

모든 변칙적 행정명령은 전부 이를 피해 가느라 만들어졌다. 

사실 이 문제야말로 조선이 건국했을 때 명분이 되었던 권문세가의 농장, 

그것과 하등 차이가 없는 문제였던 셈인데, 

이 문제는 끝까지 해결 못하고 한국사 발목을 잡았다 하겠다. 

 
*** [편집자주] ***

 
저들한테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저들이 기억하는 오직 한 가지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라는 공자님 말씀 딱 하나였다. 

이 문구는 본래 군역과 노동력 징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가혹함을 징계 질타하는 위대한 권리장전이었지만, 저 말이 곧 저들한테는 메시아적 외침이었으니, 

그에서 합법으로 빠져나가는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국가는 가혹한 수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저 선언이 그렇게도 조선 땅에서는 멋들어지게 양반이 군역과 노동력 징발에서는 빠져도 된다는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쇄미록을 필두로 하는 임진왜란 실기류인 이른바 용사일기들을 보면 웃기는 게, 내가 뭔가 일으켜서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는 의식 자체는 전연 없고, 오로지 마누라 첩, 부모 자식만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쇄미록? 그래 저자가 이 무렵 이미 늙은 탓도 있겠지만, 국가와 왕을 위해 하는 일은 눈꼽만큼도 없다.

입발린 나라 걱정 하나 없다. 

그에 대해 국가는 왕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의병 참여를 독려하지만, 어느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곽재우? 정문부? 그네들이 왕실 안녕을 위해 의병을 일으킨 줄 아는가? 

내 집 내 앞마당에 왜적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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