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필기가 증언하는 수선화
수선화(水僊花)의 계절이다. 이유원은 《임하필기》 제32권 <수선화>에서 이르기를
삼여첩(三餘帖)에, “여성(女星)이 흩어져 배현(配玄)이 되었다.” 하였는데, 배현은 곧 지금의 수선화이다. 《병사(甁史)》에, “수선은 품격이 매우 청초하다. 직녀성(織女星)의 다리인 옥청(玉淸)이다. 한 포기에 잎이 많은 것을 진수선(眞水仙)이라 하고, 외쪽 잎이 나는 것을 수선이라 하고, 꽃잎이 많은 것을 옥영롱(玉玲瓏)이라 한다.” 하였다.
내가 이 꽃을 매우 좋아하여 사는 집에 편액을 써서 걸기를 ‘종수선삼백본(種水仙三百本)’이라 하였으니, “문을 열고 한 번 웃으니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네.[開門一笑大江橫]”라는 시구의 뜻을 본뜬 것이다.
이하거(李荷居)가 내의원 제조 직함을 가지고 기첩과 만나니, 온 세상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운석(雲石)이 그 소식을 듣고 이공을 만나 말하기를, “공이 나이 칠십에 비로소 기생을 사랑할 줄 아니, 마땅히 꽃으로 축하해야겠다.” 하고는 수선 화분 하나를 보냈다. 수선이 여정(女精)이 된 것은 실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수선은 강남에서 난다. 지난 임신년(1812, 순조12)에 자하(紫霞)가 연경에 사신 갔다가 겨울에 돌아오면서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초이다.
지금까지 60년 동안 끊이지 않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는데, 갑오년 뒤로는 연경에서 들여오는 것을 금지한 물품 조목 속에 그것 또한 포함되어 수년 동안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다.
뒤로 차츰 금령이 느슨하여졌다. 함풍(咸豐) 때 남비(南匪)의 전쟁으로 황성(皇城)에도 종자가 끊어져 지금까지 매매되는 것이 많지 않다.
고 하였다.
그러나 전 시대 송시열 등의 시문에도 자주 보이니, 자하 신위가 가져온 것은 새로운 품종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