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내용이 없는 율곡의 경장론更張論
율곡의 경장론은 꽤 유명하다. 경장更張이란 간단히 개혁이란 뜻이다. 갑오개혁을 갑오경장이라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내용이 없다.
경장론이라고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부분
왜 경장이 제대로 안되는지 그 이유를 말한 것이지
경장의 내용 자체가 아니다.
율곡은 공허한 이야기를 아는 척 이야기하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경장론의 내용이 있었을 것이며
이는 이미 200년이 지나 노후화한 조선판 신법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그 내용이 없다.
율곡이 그의 출사경력 마지막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 병조판서 시절이었고 보면,
그의 경장론은 군역에 집중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군역을 짊어질 사람들 숫자가 자꾸 줄어드는 이유를 아마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를 수정할 근본적 개혁책을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사서 어디에도 그의 경장론의 구체적 내역이 없다.
그는 양반에게 군역을 부과할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실 사람들은 그의 "십만양병론"을 그냥 병사를 늘이자는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조선시대에 양반에게 군역을 부과하지 않고는 십만양병을 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그가 생각한 경장의 핵심은 군역이 개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 [편집자주] ***
이 십만양병설이 율곡이 죽은 뒤에 그 전집을 편찬하면서 그가 속한 서인들이 임란 책임 회피 차원에서 찡가넣었다는 주장이 근현대 동인 남인 계열 역사가들한테서 득세한다.
하지만 이 양병설은 이미 유몽인이 조정에서 직접 율곡이 진언하는 말을 들었다고 채록할 정도로 신빙성이 높다.
그 십만양병이 가능했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곡이 왜 저 주장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느냐가 중요하다.
나 역시 그의 경장론 핵심은 역시 군역 개혁이었다고 본다.
저 십만양병을 후대 부회라고 아예 논의 자체를 막아버리니 논의에 진전이 없다.
그는 분명 균역을 개혁하려 했고 이를 위해 신분제까지 손대야 한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저 논의를 막아버린 근현대 역사학도는 대체로 영남 출신 남인 퇴계 학통이며 그 대표가 벽사 이우성과 부산대 재직한 이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