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으로 양산되는 서얼들

여기서 서얼이라 하면 사실 조선후기에
서자와 얼자가 같은 사회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얼자는 당연히 천민으로 자기 아버지의 노비로 가내노예로 묶여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평민 처의 자식인 서자의 경우, 양반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복잡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본인은 양반의 후손이라는 강렬한 의식이 있었고,
족보에도 서자라 적힐 망정 이름 석자가 올라가고,
호적에도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이름이 적히지만,
대개 일반적인 양반들보다는 하나 아래의 업유, 업무 등 직역을 받았다.
비록 한 단계 떨어진다 해도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직역은 유학과 무과를 수련하는 것이 직역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
당연히 양반 끄트머리에 해당하고, 군역은 지지 않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들을 향촌중인이라 불러 양반과 구별한다. 하지만 호적상에서는 이들도 양반 직역을 받는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서자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겠다.
조선시대에, 흔히 "족보를 사서 들어갔다"고 이야기 하는 경우,
정말 족보를 사서 들어간 경우도 있겠지만, 이름이 좀 알려진 소위 벌열 가문의 경우,
족보를 사는 것만으로는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조선후기 당시 양반은 개인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향촌 사회에 친족으로 묶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의 경우 필자가 보기엔 그 집안에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던 서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선대 족보에 보이지 않다가 후대에 끼어 드는 경우,
특히 이전 족보에 "무후無後"라고 후손이 끊겼다고 되어 있지 않은 분의 아래로 끼어 드는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이들은 서자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는 말이다.
왜냐.
19세기 이전 조선의 족보는 서자의 경우,
서자라로 쓰며 끼워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들은 그래도 굉장히 관용적인 집안으로
많은 집안에서는 서자는 족보에 쓰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시대 서자는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서자는 노비보다도 전면에 더 부각되지 않는다.
호적에는 서자라고 적지 않기 때문에 서자인지 아닌지 직역으로 어슴푸레 짐작할 뿐이며,
족보에는 서자라고 선대 족보에 잇지 않으면 후대에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조선시대 서자라는 것이 내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서자의 후손이라는 딱지를 가진 사람들은
세대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증가할 수밖에 없고, 절대로 줄어들수는 없었다.
적자로만 이어지는 집안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략 한 집안 족보에서 종가집으로 누대 방목에 오르는 급제, 입격자를 내지 않았다면,
필자 생각으로는 누구든 장담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