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이야기

조선시대의 방목과 호적, 그리고 족보

신동훈 識 2026. 1. 1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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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기축 사마방목 萬曆己丑 司馬榜目

 

조선시대 향촌 질서를 보여주는 3대 자료라고 한다면 

첫째는 과거 입격, 출신, 급제자 프로필을 모아 놓은 방목榜目, 

둘째는 국가가 작성하고 유지한 호적, 

그리고 마지막은 문중이 써내려가고 출판한 족보가 되겠다. 

이 세 가지 자료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 

우선 뻥을 쳤다가는 모가지가 날라갈 수도 있는 엄정함이 있는 기록이 바로 

방목이다. 

과거를 보면서도 사기를 쳤다가 적발되어 경을 치게 되는 기록이 간간히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호적과 비교해도 방목은 과거 합격자와 그 조상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맘대로 뻥을 치기 어려운 엄정함이 있다고 해야 할까. 

호적에도 유학幼學이라고 버젓이 적혀 있는 이들도 

방목에는 한등 낮추어 한량閑良이라고 적어 두는 경우도 있다. 

호적은 방목보다는 못하지만, 최종적으로 기록하는 주체는 국가, 관공서라는 점에서 

개인과 집안의 의사를 백 프로 반영한 신분이 적히지 않는 다는 점에서 

족보보다는 엄정하지만, 

향촌에서 국가권력과 개인, 집안간 타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방목보다는 어느 정도 뻥튀기가 가능한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호적에는 유학이라고 적힌 사람들도 

폼잡는 양반들 향안鄕案이나 청금록靑衿錄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이도 많았다. 

호적에는 유학이라 적어놔도 

양반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방목보다는 뻥튀기가 가능하다고 해도, 

호적은 족보에 비하면 훨씬 객관적으로 

족보는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했다고 보이는 집안 족보들도 

불리한 것은 몽땅 빼고 유리한 것만 적고, 

거기다 있는 것 없는 것 죄다 같다 붙이다 보니

방목이나 호적에는 비할 바가 아닌 반쯤은 판타지물 같은 계보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방목, 호적이 우리나라 모두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조선시대의 향촌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분명해졌을 것인데, 

방목도 온전하지 않고 호적은 태반이 사라져 버렸으니, 

족보는 호랑이 없는 곳에서 토끼가 왕인 것처럼 

날개를 단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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