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청백리는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청백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청백리가 되어서는 사대부로서 대를 이을 수가 없다는 말이 옳겠다. 
조선시대는 어느 정도 재산이 없다면, 
토지와 노비가 없다면 사대부로서 대를 이어 존속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었다. 
노비 수백 명을 거느린 양반은 퇴계나 몇몇 양반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집안에 수백 명 노비를 거느리지 않은 집안은
대를 따라 내려가면 거의 잔반화해 버리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청백리를 하는 건 좋은데 
우리 아들 손자대로 가면 양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 불확실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청백리 운운은 전부 거짓말이다. 
가난한 청백리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집안은 몇 대 못가 망하고 양반에서 탈락한다. 
양반으로 수백 년을 이어간 집안들은 전부 토지와 노배를 거느린
대지주였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호적이 동네마다 다 남아 있었으면
작살나는 것은 우리나라 족보만이 아니다. 
청백리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우리나라 양반들의 실상
그것도 전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인데
천만 다행으로 조선시대 호적 남아 있는 동네가 몇 개 안 되어
우리나라 양반들은 체면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퇴계도 재수 없이 분재기가 남아 이 양반이 대부호였다는 것이 백일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지
조선시대 호적이 남아 있었으면
양반들이 얼마나 축재술에 능한 존재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을 것이다. 
쇄미록을 보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오로지 우리집 먹고 살 궁리, 노비들 부릴 궁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것이 어떤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양반들이 죄다 그런 꼴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옳겠다. 
그러니 학문이고 뭐고 새로운 것 하나 없이 
송대 유학자 논쟁사를 후안무치하게 그대로 배께 떠들고는 
마치 자기들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사기들을 치며 조선 후기
그 엄중한 세월을 보낸 것 아니겠나. 
우리나라 조선 후기 사대부는
학자도 아니고 윤리의식 투철한 도학자는 더더욱 아니며
그냥 비즈니스맨이다. 
노비와 토지를 이리저리 굴리며 재산을 쌓아가는 비즈니스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