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호적의 구조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몇 마디 써 본다.
1. 조선시대 호적에는 당연히 양반에게 "양반"이라고 쓰여져 있지 않다.
일제시대 호적에는 "사족"이라던가 일본 호적에서 쓰는 방식대로
우리 호적에도 적은 경우가 있다던데,
조선시대에는 "양반"혹은 "사족"이란 호적에 쓸 수 없는 명칭이었다.
이는 조선이 아무리 양반에게 우호적이라도
그 나라 설계 자체는 양천제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호적에는 양반이라 쓰여 있는 대신
양반에게만 부여되는 직역이 쓰여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학幼學"이다.
그리고 서얼 혹은 중인에게는 "업유業儒" 혹은 "업무業武"라는 직역이 쓰인다.
그 외에도 잡다한 직역이 있는데 양반 직역은 대개 호적을 보면 알 수 있어
호적으로 양반을 어느 정도 구별해 낼 수 있다.
2. 소과 입격자의 경우, 그 사실은 호적에 적혀있지 않다.
대신 소과 입격자에 상응하는 벼슬을 얻게 되면 그 벼슬이름을 적는다.
그런 벼슬도 없으면 그냥 유학이다.
조선시대에 대과 급제 혹은 무과 급제자는 "출신"이 되어 호적에 그리 벼슬 대신 적히지만
소과 입격자는 대과급제, 혹은 무과급제자와는 달리 그 사실이 호적에 따로 적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과 급제자는 뭐라도 작은 벼슬이라도 찾아 걸치게 마련이므로 그냥 유학으로 머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겠다.
3. 호적에서 주호의 신분이 좀 애매한 경우, 배우자의 호칭을 보면 대략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민 이상의 경우, 무조건 여성 이름은 따로 호적에 적지 않았다.
호적에 여성 이름이 적히면 천민이다.
여성 성 뒤에 소사召史(혹은 조이)라고 적히면 평민이다.
여성 성 뒤에 "성"이라 적히면 중인이다.
양반의 경우에는 여성의 성 뒤에 "씨"를 붙인다.
이 사실은 여려 선학이 지적한 바 있는데
필자 역시 이런 여성이 호칭이 남성의 직역 보다도 훨씬 예민하게 그 집 사정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본다.
4. 호적에는 서얼을 따로 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얼에게는 서얼에 주로 부여되던 직역이 있다.
앞에서 예를 든 업무, 업유, 그리고 한량閑良 등도
서얼이나 중인에게 주로 부여되던 직역이다.
이 직역은 평민보다는 높고, 양반보다는 낮다.
그런데 이 직역을 받은 사람들은 기회만 보면 유학을 칭했다.
호적 조사 때마다 가장 부침과 변동이 심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을 추적하면 어떤 때는 유학이다가 어떤 때는 업무, 어떤 때는 심지어 군관이 되는 등
부침이 매우 심하다.
5. 같은 마을의 시계열 호적이 남아 있으면 족보조작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후대에 조상을 공명첩으로 추층하더라도
윗대 호적 자료에는 그대로 원래의 직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족보에는 이렇게 추증해 놓은 벼슬을 적어 놓기 때문에
후손들은 조상들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양반 조상으로 알게 된다.
실제로는 한 명만 재산을 좀 모으면 자기 포함 3대조까지 추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족보에 공명첩 벼슬을 적어 놓고
후손들에게도 공명첩 고신을 물려주면 자손들은 당연히 조상이 대단한 벼슬을 지낸 줄 알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조상이 대대로 양반인 줄 아는 많은 집안이 이런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