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와 호적

앞에서도 썼지만 필자는 족보를 심심풀이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자료를 조선시대 인구 구조의 변동을 살피는 데 쓸 수 있을까 해서다.
필자는 근래 조선시대 검안 서류를 보고 있는데
이 자료에 적힌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이 양반 자손이라는 족보가 그리는 조선시대 사회상은
당연히 당시의 검안서류라던가,
호적과는 맞지 않는다. 당연히 족보 쪽 위조와 분식 탓이다.
우리나라 조선후기를 연구하는 데 주목할 만한 세 개 자료,
방목과 호적, 족보 이 셋을 두고 보자면,
국가가 관리하여 신뢰도에 토를 달기 어려운 방목을 제외하면
호적과 족보 이 둘은 엄격한 사료 비판을 전제하여야 간신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족보에 비하면 훨씬 객관적이라 할 호적조차
방목을 보면 이 역시 분식의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본다.
우리나라 호적 하면 나오는 "기록의 문란"은 사실
당시 사람들의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틀에서 어떻게든 자기의 실체를 반영하고자 하는 민중의 욕구와
이를 무작정 허용하기 어려운 향촌까지 침투한 국가권력,
그리고 향촌에서 개인을 통제하는 또 다른 존재인 문중,
이 셋의 부단한 이해관계의 충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차라리 게으름의 산물이라면 훨씬 판단이 쉬울 것을
그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잔머리와 타협의 산물이 호적이라
호적은 액면 그대로 국가의 기록이라 백프로 취신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호적도 족보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족보는 아주 엄정하여 국가 기록, 공적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어떤 족보는 슬쩍 슬쩍 거짓을 마치 사실인양 끼워 넣어 방심하여 보면 안 되는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아예 족보 한 권을 통채로 날조한 팬더지물같은 족보도 있다.
이런 족보 전체를 모두 뭉뚱그려 하나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족보가 학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제3의 기록에 의해 검증이 안 되는 영역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날조와 거짓 때문인데,
거기에 문중의 위신과 자부심이라는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족보는 철옹성 같은 모습을 갖게 된다.
이 족보를 그나마 학술의 영역에서 진실의 편린이라도 찾으려면
이 족보를 문자 그대로 하나 하나 해체하여 믿을 만한 것만 골라내는 작업이 필수적일 텐데,
문중이라는 집단이 이를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보통이라,
족보가 학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기란 부지하세월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