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이야기: 선대계보의 확립 (3)
이렇게 단계의 직계 계보,
혹은 직계계보에 몇몇 방계에 대한 소략한 기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집안의 가계에 대한 정보이다.
이는 아무리 잘난 집안도 마찬가지다.
몇대만 내려가 버리면 그 선대에 갈려나간 집안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나라 초창기 족보인 안동권씨, 문화유씨 족보에 대해
이는 부계 족보가 강화되기 이전, 모계와 부계를 동일하게 다루던 전통이라고 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한 명의 부계 조상에서 내려오는 부계 족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안동권씨 문화유씨 족보에 실린 정보와 그 사람들은
안동권씨 문화유씨 집안에서는 전부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부계나 모계, 처가 사위집안까지 알 만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다 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시조부터 5-6대만 갈려 나가도
부계 족보를 막상 만들려고 하면,
이 안에는 내가 전혀 모르는 동성의 일가도 다수 포함되게 된다.
17세기 초반, 평산신씨 최초의 족보를 편찬한 신익성은
그 족보의 편찬 경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 예전에 보첩譜牒이 있었으나 병화에 없어졌기에 선군자先君子(신흠)께서 유배 중에 세보世譜를 편찬하셨다. 근원을 소급하고 지파를 찾아 내외 지손까지 모두 수록하였는데, 손수 초록하여 집에 보관하였으나 여전히 완성하지 못한 책이었다.
내가 부음을 듣고 와서 남긴 책을 정리하다가 세보를 발견했는데, 책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것은 선군자께서 후손에게 남기신 것이니, 그 책임은 실로 내게 있다.”
[2] 그리고는 사방에 흩어져 사는 동성同姓들을 찾았는데, 평산에 있는 것이 열네 집, 춘천春川, 청주淸州, 안동安東, 문경聞慶, 인동仁同, 의성義城, 예안禮安, 대구大丘, 영천榮川, 예천醴泉에도 십수 집이 있었다.
선군자가 편찬하신 내용에 여러 집안 보첩을 참고하여 성을 얻은 자를 모조리 수록하여 족보를 만들고는 성보姓譜라고 하였다.
여자라도 모두 기록하였으니, 이를 통해 찾아보면 여자의 자손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찾을 수 있다.
사실을 전하는 책이므로 간결을 추구하고 본말을 밝혔으니, 안에는 후하고 바깥에는 박한 것이 아니다.
예천 일파도 본디 근거가 있으니 아울러 뒤에 부록하였다. (장유승 2014에서 전재)
다시 말해, 신익성은 공통의 조상에서 갈려 나온지 9대가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 보니,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해서 파악이 불가능한 단계까지 가 있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위 글에서 신흠이 만들었다는 세보에 대한 기록[1]은 그가 자기 집안을 자세히 적고 자기 집안에서 볼 때 방계는 소략하게 적어둔 계보다.
하지만 이를 대동보 형식으로 만들려니 [1]과 같은 방식으로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2]와 같은 방식으로 부계 자손에 대한 체계적 수단收單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대동보는 [2]의 작업을 거친 것으로 한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있는 집안 계보와는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2]의 작업을 거쳐 만든 대동보를 [1]과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기 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