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이야기: 선대계보의 확립(2)
우리나라는 각 씨족이 길게는 삼국시대를 넘어 고조선까지 연원을 소급하는 경우도 보지만
그 전승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대략 조선시대의 우성 벌족들의 기원은
고려 무신정권 이후다.
고려시대는 500년이나 되므로 큰 변화를 겪는데,
대략 무신정권을 기점으로 그 지배계급에 있어 큰 변화를 낳는다.
무신정권 때의 격변이 생각보다 매우 심했음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약 부상한 씨족들이 결국 여말선초기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고려 전기에 손꼽는 명문이었던 김부식 같은 경우
그는 경주김씨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확실한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김부식 직계 후손이 남아 있지 않다.
무신정권 때 무신들이 도륙한 문신의 중요한 타겟으로
집안 자체가 이 시점에 결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무신정권기에 성립한 씨족들-.
대부분이 그다지 대단한 집안이 아닌지라
선계 계보라고 해 봐야 간신히 이름 정도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문제겠다.
여말선초를 넘어 조선초기가 되면 많은 명문 집안이 성립하지만
일차적으로 매우 빈약한 단계 계보 정도 간신히 가지게 된 것은
여말선초, 나아가서는 무신정권 이전 이들 집안이 상대적으로 한미했기 때문인 바,
일부 명문 집안에서 족보의 제작이 시도되던 조선 전기 중엽 무렵에도
이들의 고려시대 선계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아무 집안이나 예를 들면 족보에 목숨을 건 분들의 시비가 있을 수 있는 고로,
필자 집안의 예를 들어보자면,
시조는 유명한 동수대전에서 전사하여 공신이 된 신숭겸인데,
이 시조로 부터 고려 말까지 계보는 단계로 열한 분 이름만 간신히 전해 온다.
이것도 사실 기간에 비하면 남아 있는 분들 숫자가 많지 않아
중간에 2-3 대 정도 빠지지 않았을까 싶은 단계계보다.
그런데 이 계보가 완전히 조작된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 것이,
고려사를 보면 100년에 한번 꼴로 신숭겸의 후손을 찾아 벼슬을 내리는 기록이 몇몇 남아 있어
이런 단계계보가 전해 내려왔다 해서 크게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말선초가 되면 이미 복잡한 방계 계보는 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시조에서 현세까지 이어지는 단계계보하나를 간신히 손에 쥔 형태로 집안 내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 바,
이러한 사정은 꼭 이 집안 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도 거의 비슷한 사정이었다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현식의 단계계보는 생소하지 않은 것이
불과 우리 할아버지들 때만해도
가첩이라 해서 직계 조상들의 이름과 간단한 내력을 적은 손바닥에 딱 들어올 만한 계보는
집집마다 상당수 전해지는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러한 형태의 직계계보 가첩이야 말로 여말선초 우성벌족이라 해도
이 정도의 정보만 손에 쥐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만 이런것이 아니라,
옆나라 일본의 경우에도 아무리 잘나가는 전국시대 무장 출신 사무라이 집안이라 해도,
그 계보는 직계계보 위주로 단계만 전해지는 경우가 많으니,
계보를 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직계계보로서,
방계까지 아우른 파보나 대동보의 형식은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