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조선시대 미라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9)

초야잠필 2019. 6.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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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곽묘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의 하나는 회곽묘 구조가 처음 조선 땅에 출현했을 때와 나중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백문화재연구원 방유리 선생의 "조선시대 회격묘 출토 유물의 수습과 보존" (야외고고학 제 7호)이나 김우림 선생의 단행본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을 보면 이 부분이 비교적 자세하다. 

김우림 선생 주장에 따르면 조선전기에는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대로 회곽묘를 만들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국조오례의" 방식의 회곽묘 제작 기법. 방유리 선생의 논문에서 전재하였다. 초기 방식의 회곽묘 제작 방식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묘광을 파고 그 위에 목곽-목관을 놓고 주변에 회를 포함한 삼물을 부어 쌓아 콘크리트 박스처럼 만드는 방식이다. 
 

국조오례 방식에 따라 조영된 회곽묘. 목곽-목관 이중관이며 목곽에는 회벽이 완전히 엉겨 붙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곽을 묘광에 먼저 놓고 주변에 회를 쌓아 올려 굳힌 데서 나온 현상이다. 
 
반면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국조오례 방식 회곽묘 제작 기법이 주자가례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주자가례 기법에 따라 수정되기 시작하는데 이 방식이 아래 보이는 방식이다.

국조오례 방식과 달리 회벽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그 내부에 생긴 공간에 관을 안치하는 방식임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목곽이 사라진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목곽-목관 2중관이 아니라 회로 만든 벽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에 목관만 안치한다.

이를 종전에는 "주자가례" 방식 회곽묘라고 불렀는데 최근 김우림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주자가례" 방식 회곽묘만 회곽묘라고 부르고 "국조오례의" 방식 회곽묘는 회격묘라고 불러 명칭을 구분했다. 
 

"주자가례" 방식의 회곽묘. 역시 방유리 선생 논문에서 전재하였다.

조선후기 "주자가례" 방식에 따라 만든 회곽묘. 회벽을 사전에 만들어 생긴 공간에 관을 나중에 안치한다.

 
이 두 가지 방식 회곽묘 중 조선 후기 무덤에서 많이 보이는 "주자가례 방식 회곽묘"야말로 주자가 채록한 방식 그대로의 제작 기법을 복원해 낸 최종 산물이다.

이런 모양의 회곽묘는 물론 그 기원이라 할 중국의 요장묘에서도 일부 보이긴 하는 것 같지만 주자가 이 방식을 현창한 것과는 무관하게 필자가 보기엔 중국에서도 역시 주류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반면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런 모양의 "주자가례 방식 회곽묘"가 수도 없이 조선땅에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동에서 확인된 미라. 안동대와 진주박물관이 조사했다. 사진은 국박 이양수 박사 제공.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회곽묘 중 조선시대 미라가 더 많이 발견되는 것은 "국조오례의" 방식 회곽묘다. 물론 "주자가례 방식"에서도 미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에 비해 훨씬 드문 것도 사실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는 앞으로 연재를 바꾸어 또 쓸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회곽묘에서 미라가 만들어지는 기전을 정확히 규명하기란 그렇게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완전한 규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고 본다.

필자는 이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가지고 있고 일부는 증명된 부분도 있지만 아직 완전한 해명에는 거리가 있다. 

독자 여러분은 주자가 남긴 "주자가례"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써놓은 구절을 수백 년에 걸쳐 고찰하면서 마침내 주자가 묘사한 그대로 회곽묘를 조선 땅에 구현한 모습을 보고 복잡한 생각이 들 것이다.

아마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틀림없이 나오리라 생각하는데 완벽한 정답은 아니겠지만 필자 생각을 적어본다. 

 
문: 회곽묘는 우리 전통과 유리流離한 중국문화 수입 아닌가? 
 
답: 맞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학로서 변명해 본다면 그들이 받아들이고자 한 것은 "중국문화"라기 보다 "고례古禮"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당시 중국 문화 역시 "시왕지례時王之禮"일 뿐, 중국에서 유행하는 문화라고 해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공자가 이야기한 대로 "문헌으로 고찰할수 있는 고례 古禮"라면 그것이야말로 도입 대상이 되는 것이며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가례 가르침 대로 회곽묘를 만들고자 한 것은 "고례"를 구현하기 위함이지 "중국문화"를 도입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양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문헌으로 상고할 수 없고 고례로 간주하기 어렵고 논리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라면 도입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베트남 후에(Hue)에 남아 있는 전통 왕조 시대 국자감. 이들 역시 텍스트를 보고 자신들의 상상력을 보태어 유교왕국 틀을 완성했을 것이다
 
문: 예를 들어본다면?

답: 시왕지례의 하나라고 할 것 중에 "관왕묘"가 있다. 임란 이후 관우 숭배가 중국 장군들에 의해 수입되면서 조선 지배층에도 관왕묘 건설과 참배가 강요되었다. 이 중국문화 수입에 대한 조선 유학자의 반응을 사서에서 찾아보면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래에 그 예를 하나 달아본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관왕묘에 행례하는 일에 대해 널리 상고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상고하였으나 옛날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낸 유類에서는 준거할 만한 것이 없었고, 오직 송조宋祖 개보開寶 3년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대 공신功臣과 열사烈士의 등급을 품제品第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관우關羽도 그 속에 들어 있으니, 소위 관왕묘라는 것은 명나라 이전에 이미 제사지낸 일이 있습니다. 중국 장수들은 매우 존경하여 사맹삭四孟朔과 세모歲暮 및 그의 생신에는 모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한 사실이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증사신기편增祀神祇篇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경리를 비롯한 제공諸公들이 관왕묘에 나아가 분향하고 또 상께서도 예식을 행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로 말하면 이런 제사는 없었고 엇비슷하여 모방할 만한 규칙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상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응당 행해야 할 제사가 아닌데 경솔하게 조처하면 올바른 제사의 의식에 합당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2일 병신 8번째기사>
 

동묘 (관왕묘)

 
문: 조선시대 회곽묘 성립과 유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답: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현재에 응용하고자 하는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한다면 조선시대 회곽묘 출현이 가지고 있는 제반 특징·이전 전통과의 단절성·고례에 대한 강한 회귀본능·조선시대 예학과의 관련성 등등은 최근들어 우리가 "복원"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조선시대 각종 "의례"들과 크게 보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전통 의례로 복원해 낸 친영례나 회곽묘는 조선시대 사상적 조류에서 볼 때 같은 동기에서 만들어 낸 비슷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솔로몬의 성전 (Solomon's temple). 이에 대한 기독교 관심은 사실 조선 유학자의 회곽묘에 대한 관심과 큰 차이가 없다.

운현궁에서 매년 재현되는 고종 친영례. 사실 친영례 역시 고례의 하나로 이전 시기와의 전통의 단절성. 조선 예학과의 유대 등 복원 된 의례라는 점에서 회곽묘와 별 차이가 없는 역사적 전통이다. 친영례 역시 고례에 대한 이해 없이는 조선시대에 출현하기 어려운 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회곽묘를 만들라고 설파한 주자는 과연 회곽묘에 묻혔을까? 

필자가 웹서핑을 해서는 그 사실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설마 주자가례에 회곽묘를 쓰라고 해 놓고 자기는 다른 무덤에 묻혔을까 싶기도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사진으로 확인되는 주희 무덤은 우리에게 어째 생소한 모습이기만 하다 (完). 
 

주희묘

福建省南平市에 있다는 주희묘. 어째 분위기가 이 양반은 회곽묘에 묻혔을 거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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