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는 김정희의 자字가 아니다
며칠 전 추사秋史는 김정희의 호號가 아니라 자字라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810년 청나라를 방문하여 청나라 문인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은 정희고, 자(字)는 추사(秋史)이며, 호는 보담재(寶覃齋)라고 적은 것을 통해 추사가 자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자필로 쓴 것이니 믿을 만하다고 여긴 듯하다.
당시 간략히 정리해야겠다고 여겼지만, 당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지라 그러지 못하고 답글로 대충만 쓴 적이 있었다.
민규호(閔奎鎬, 1836~1878)가 지은 〈완당김공 소전(阮堂金公小傳)〉에는
“김공 정희(金公正喜)의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이며, 또 다른 호는 추사(秋史)인데, 본관이 경주(慶州)이다.[金公正喜 字元春 號阮堂 又號秋史 慶州人也 ] ”
라고 하였으니, 자가 원춘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자는 이름과 호응하도록 짓거나 특별한 의미가 담긴 글자를 사용한다.
喜는 항렬이니 正과 뜻이 호응하는 자가 원춘(元春)이다.
그러면 자를 고쳤을까? 그렇지는 않다.
김정희가 순조 9년(1809) 기사(己巳) 증광시(增廣試)에 생원 1등 4위로 입격(入格)했을 때 《숭정182년기사원자탄강경증광사마방목(崇禎百八十二年己巳元子誕降慶增廣司馬榜目)》에는 자가 원춘(元春)으로 기재되었다.
그 이듬해 청나라를 방문하여 자가 추사라고 썼으니 그럼 그때 바꾼 것인가? 그렇지 않다.
1816년에 민노행(閔魯行, 1777~1845)이 지은 〈실사구시설 후서(實事求是說後敍)〉에서
“내가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 속으로 의심을 가진 나머지, 우연히 김원춘(金元春)에게 이 말을 해 주었더니, 원춘이 즉시 자기가 지은 실사구시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余甞窃疑於斯 偶爲金元春語之 元春卽以其所爲實事求是說示之]”
라고 하였으니, 자를 그대로 사용했고, 순조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로 급제했을 때의 방목에도 자가 원춘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 스스로 추사가 호라고 밝힌 글이 있다. 〈금헌과 더불어 함께 종경릉의 운을 뽑다[與今軒共拈鐘竟陵韻] 10수〉라는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신선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네. 입사천 샘 소리에 서로 마음 통하였고, 삼천이라 게자엔 묵륜이 멈추었네.……[區區文字有精靈 舊買仙人白石亭 卄四泉聲心印合 三千偈子墨輪停]”
라는 시의 ‘입사천 샘 소리에 서로 마음 통하였고[卄四泉聲心印合]’는 구절에 스스로 주석하기를
“왕추사(王秋史)의 다른 호가 입사천초당인데 나도 추사라 호를 지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王秋史一號廿四泉草堂。余又號秋史故云]”
라고 하였다. 스스로 추사라고 호를 지은 것은 왕추사를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왕추사는 청나라 문인 왕평(王苹, 1661~1720)을 이른다.
그는 자가 추사(秋史)이고, 호가 요곡산인(蓼谷山人)인데 그가 산동성 제남시 72명천 가운데 24천(泉) 곁에 초당이 있어서 칠십이천주인(七十二泉主人)이라고 자호하였는데, 김정희는 이를 24천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김정희의 자는 원춘이 틀림이 없고 고친 적이 없으며 추사는 왕추사를 흠모하여 추사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1810년 청나라 문인에게 남긴 필담에 자(字)가 추사(秋史)이고, 호가 보담재(寶覃齋)라고 스스로 쓴 것은 어째서 일까?
추사는 청나라 서예가이며 금석학자인 담계(覃谿)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문장은 자가 추사인 왕평(王苹)에 견주느라 추사를 자라고 하고, 글씨는 담계(覃谿) 옹방강에 견주고자 호를 보담재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
첨언: 종로구 부암동 백석동천이 추사가 말한 백석정이다. 그곳 계곡을 입사천으로 삼고 자가 추사인 청나라 왕평에 견주어 자신의 호를 추사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