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겸병이 지주전호제의 증거인가

필자는 앞에서 쓴 대로
우리나라는 지주전호제 성립이 상당히 늦다고 본다.
이유는 18세기 전기까지도 우리나라 호적을 보면
노비사역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토지 경영이 양반 경제의 기초라
거기에 지주전호제가 파고들 여지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 역사에서 지주전호제의 성립 근거로
겸병의 역사를 들고 오는데,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082_0080
토지겸병과 지주전호제는 같은 것이 아니다.
토지겸병을 하여 대규모 토지를 확보한 후
거기에 완전한 인신 예속 상태인 노비를 동원하여 경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선 중기까지도 토지 겸병으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한 양반들이
그 땅을 소작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소유한 노비를 동원해서 농사를 지었다고 본다.
물론 이 당시에도 외거노비들은 있었고, 자기 동네 밖에서도 이들로 부터 연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이 소작인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거노비들, 특히 다른 동네에 있는 외거노비들은
일단 토지겸병의 예에서 다루어지는 "그러나 겸병하는 폐단 때문에 부자는 전지가 서로 잇닿아 있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습니다..." 라 하여 일정 지역에 집중하여 연속된 대규모 토지를 토지겸병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외거노비를 토지겸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토지겸병에 대한 사료 기록으로 지주전호제의 시작을 점치는 것은 그래서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주 소작인 관계, 지주전호제가 성립된 것은 이것보다 훨씬 늦다.
필자 생각에는 숙종대에 시작하여 영조대를 넘어서면서 비로소
노비를 대규모토지에 직접 사역하는 양반의 토지 관리 행태가 주류에서 떨어지고
그 시대 이후에 비로소 지주전호제가 성립되었다고 본다.
19세기가 되면 이전과 같은 노비를 많이 거느린 양반호의 수가 격감하며 (그래도 여전히 있기는 있다)
그 대신 주호와 약간 명의 노비만 둔 (한 명만 둔 유학호도 많다)
그런 호구가 대거 증가하는 바
이들이 바로 지주 소작인제도, 지주전호제의 바탕을 이루는
소농경영이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지주전호제는 18세기 중엽경에 비로소 노비를 사역하는 대토지 경영을 누르고 부상하였으니,
해방이후 토지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주전호제는 겨우 200년 남짓한 역사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