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위광을 자랑한 진주 용암사 터를 가다
지금의 절을 본 김에 옛날 절자리를 보러 가자 해서 들르게 된 곳.
또다시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보는데 산중이라곤 하나 제법 넓은 들도 있고 집 몇 채가 모인 마을도 있다.
차를 세우고 슬슬 걸어가는데 길 어귀부터 옛 기왓장이 천지다.
물고기뼈 모양 어골무늬도 있고 격자무늬나 비내리는 것 같은 무늬가 새겨진 것도 있고, 더러 흐릿하게나마 명문이 남은 것도 보였다. 녹유를 바른 전돌이 나오기도 한단다.
한 10분 걸었을까? 대나무밭이 길 옆을 따라 이어진다.
꼬불꼬불한 대나무 뿌리가 어찌나 기운 센지 더러 기와조각을 꽉 움켜쥐기도 하고 또 암반을 깨고 들어가기도 한다. 그 뿌리가 틔운 대밭이 다할 즈음 절 아닌 재실 하나가 나타난다.
이 진주 용암사란 절은 용암이 흘러 생긴 게 아니라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는 꽤 번성했던 모양으로, 100여 칸이나 되는 건물에 팔만대장경 인쇄본 완질을 갖추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해주정씨 문중이 그 터를 차지해 재실을 세웠다.
사실 이 재실과 부속 건물도 제법 나이를 먹었고, 특히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 문집 목판을 여기 보관했다니 그 역사성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치고, 재실 영역 안에 승탑과 석조 지장보살상이 남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러 온 것이다.
개가 한 세 마리 있었는데 어찌나 짖어싸는지, 낯선 이를 경계하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솔직히 좀 무서웠다.
한쪽엔 아마도 절이 있을 때부터 있었을 우물도 있고, 석탑 부재도 몇 놓여 있었다.
오른쪽으로 좀 깊이 들어가니 귀부 하나가 눈에 띈다. 어느 고승의 사연을 적은 비가 꽂혀 있었겠지만, 남은 건 그 비의 이수 곧 머릿돌뿐이다.
거북이는 머리가 댕강 부러진 흔적이 완연하고, 이수 제액 부분은 누가 갈았던지 글자가 흐릿하다. 넓을 홍에 자비로울 자 정도만 겨우 읽었는데, 찾아보니
'대천태종홍자국통비大天台宗弘慈國統碑'로 판독된단다.
아닌게 아니라 이수를 새긴 솜씨나 그 크기가 족히 국사나 왕사급이다.
저 뒤 승탑 주인일까? 여기가 원래 위치는 아닌 듯 싶고 일부 부재가 바뀐 느낌이지만, 조각은 제법 볼 만해서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은 되어보였다. 그러니 보물로 지정된 게 아닐까.
다 좋은데 안내판은 탁본을 떠야 할 지경이라 시급히 보수해주었으면 한다.
보호각에 계신 지장보살상도 만났는데 이분도 11-12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니, 확실히 여긴 고려시대 가람이다. 가끔 보이는 청자 파편도 그 점을 입증한다.
큼직한 너럭바위가 있다. 원래 탑이 그 위에 있었다는데, 터 규모로 봐선 고려시대에도 절 건물은 너럭바위 뒤가 아닌 앞에 들어섰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드물지만 없진 않다. 화순 운주사나 덕산 가야사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절을 다룬 한 기록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비밀리에 부탁을 받고 선암·운암·용암의 세 절를 창건하였다"고 하니 이른바 비보풍수 사례가 아니었을까.
산중이다 보니 역시 깊이 감추어진 느낌이나, 앞서 본 옥천사보다는 좀 트였다. 글쎄,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있지는 않았던 듯한데, 만약 문중의 양해를 얻어 발굴을 해본다면 뭔가 흥미로운 유물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럴 때가 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