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강화] 형태에서 소리로, 고증학의 본령
우리는 흔히 淸代 학풍의 최대 특징으로 고증학을 든다.
고거학考據學 혹은 훈고학訓詁學이라고도 하는 고증학考證學이란 무엇인가? (이들을 흔히 주된 활동연간을 들어 건륭 가경 연간이라 해서 건가학파乾嘉學派라고도 한다.)
이르노니 형태에서 소리로의 일대 전환이다.
전대흔钱大昕(1728~804)이며 단옥재段玉裁(1735~1815) 왕념손王念孙(1744~1832) 왕인지王引之(1766~1834) 등의 18세기 고증학의 기라성들의 글을 보면 "봄눈 녹듯이 의문이 사라진다"는 표현이 일대 유행임을 볼 수 있거니와 고증학은 그 근간이 문자학이다.
물론 이 문자학에 대한 비판이 드세자 대진 같은 이는 "그래?" 하는 심정으로 "맹자소의의증"이라 해서 문자학으로 밝혀낸 성과를 맹자 철학 전반을 재해석하는 일대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지만, 근간은 문자학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문자를 알면 경전의 뜻도 자연히 풀린다"는 모토를 내걸었으니, 이 과정에서 이들이 뱉은 말이 "문자를 알면 그 의미가 봄눈 녹듯 풀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증학이란 무엇인가?
이들이 진정으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혁명의 돌풍인 이유는 오직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리의 발견이다.
이들은 문자 자체에 얽매인 기존 학적 풍토를 혁명하면서 그것을 소리내어 읽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이 과정에서 바로 2천년 전 허신이 말한 6가지 제자製字 원리 중에서도 가차假借를 들고 나온 것이다.
예컨대 文은 후대에는 거의가 문장 글이라는 뜻이지만, 그에 견주어 무늬는 紋이지만, 실은 후자는 전자에서 생겨난 변종이니, 이 변종이 제 아버지를 밀어내는 꼴이 벌어진 것이다.
고증학은 文을 소리로 읽어내고 그것이 紋과 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니 이 소리를 토대로 다시 文의 근원적 의미를 추적하여 그것이 글이 아니라 실은 무늬였음을 밝혀내는 이런 식이었다.
이런 先河는 실은 고염무顾炎武(1613~1682)가 열었다.
왜 청대 고증학의 비조로 고염무를 거론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곤해서 이하 생략. (2013.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