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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은 문란해진 것이 아니다 타협이 많아졌을 뿐

신동훈 識 2025. 11. 2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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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현 호적장부

 
우리나라 19세기 삼정문란. 

이 삼정 문란 자체를 모두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 중 하나로 나오는 예가 바로 호적의 문란.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18-19세기 호적은

문란해 졌다고는 해도 그것이 무슨 없는 것 억지로 창작해낸 것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의 이해가 부딪혀. 충돌했을 때 

이를 타협하는 방식으로 뭔가 이색적인 기록을 남기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영조 때 균역법이 1850년인가 시행되었는데

이 법은 복잡하게 볼 것 없이 

지금까지 군포 2필 내는 평민들 부담을 1필로 줄여준다. 이것이다. 

문제는 그러면 그렇게 줄어드는 군포를 어디서 충당하느냐 이것인데, 

똑똑하디 똑똑한 영조대왕이

양반이 내야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양반들에게 군포를 내라고 했다가는 당장 자신이 반정으로 쫒겨날지도 모를 판이라, 

군포1필씩을 누구에게 부과했느냐

양반 중 가장 끄트머리 달랑 달랑 붙어 있는 종족과 

평민 중에 먹고 살 만한 이들에게 부과했다. 

그런데 이 "평민"이 문제인데

이들은 평민 출신이라는 소리이지, 

호적에는 이미 양반직역으로 등재되어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백프로이다. 

새로 군포가 부과되는 사람들은 그 전에는 군포를 안내던 사람들이어야 

평민들 줄어든 군포를 보충하는 셈이 되는 것이니, 

끄트머리 양반이건 잘사는 평민이건 간에 

이 사람들은 균역법 시행전에는 원래 군포를 안내던 사람들이니 

당연히 호적에는 양반직역으로 적혀 있던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이렇게 군포를 새로 부과해 버린 이들을 선무군관이라 불렀는데, 

안내던 군포를 내야 할 판이니 당연히 불만이 들끓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전국의 선무군관을 불러모아 무과를 치르고 

거기서 성적이 잘나오는 사람은 출신으로 삼아 우대했다던가, 

그런데 그래 봐야 그 숫자가 얼마 많지 않으니

누가 그걸 보고 선무군관을 하겠는가, 

따라서 당연히 선무군관은 균역법 초기부터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급해진 정부는 위에서 선무군관 수를 딱 정해 놓고 

도별로 부과하여 무조건 이 숫자를 채워놓으라 한 바, 

그것은 도에서 군으로 현으로 리로
행정체계를 따라 내려가며 숫자를 강제할당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아전이 그냥 호적 보고 요놈이다 해서 그를 잡아다 선무군관을 시켰을 것 같은가? 

천만에. 

그 사람들도 양반 끄트머리이긴 하지만 양반은 양반이라 

다 살아날 구멍이 있어 그 동네 문중에게 매달리니 

결국 선무군관이란 개인을 선출하여 시키면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문중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을 것 같은가? 

물론 동네마다 해결법이 달랐을 것 같긴 한데, 

필자가 호적에서 본 어떤 경우에는

그 문중에서 선무군관을 돌아가며 시키는 것이다. 

한 번 선무군관을 해서 군포를 낸 집은

다음 번에는 빠져서 업무, 업유, 유학으로 돌아가 있고 

다음 번에 선무군관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건 요번 한 번만 하면 다음 번에는 나는 양반직역으로 돌아간다는 

문중의 약속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관에서 시킨다고 한다? 

천만에. 양반끄트머리라도 한 동네에서 수십년을 살았던 유지인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그 향촌의 "문중"은

선무군관은 집안 사람들 돌아가며 시키고, 

나머지는 유학으로 남아 양반 직역을 지키는 방식을 취한다는 말이다. 

호적이 국가와 개인의 직접 맞다이 대면의 결과?

천만의 말씀이다. 

그 사이에는 향촌의 "문중"이 있었다. 

이 문중과 관청의 딜로 호적의 직역과 

심지어는 누구는 호적에 싣고 누구는 호적에서 뺀다는 것까지

결정했으리라 필자는 보고, 

남아 있는 호적을 보면

필자의 짐작이 맞을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나라 19세기 문란하다는 호적, 

실제와는 하나도 안맞는 호적은
이렇게 탄생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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