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우습게 봤다 되치기 당한 연암 박지원[1]
연암 자신은 스스로 과거를 단념했다 하고, 또 그리 볼 만한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포기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반남박씨 벌열 가문 자제로 과거 포기는 곧 시련이기도 했으니, 말이 좋아 벌열이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벌열은 실은 잔반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그도 결국 관직을 선택할 수 없었으니, 문제는 그가 우암 같은 거물 산림이 아닌 이상, 아무리 공무원 특채라 해도 기껏 얻는 관직이란 현감이나 군수에 지나지 않았고,
이조차 과거급제자냐 아니냐는 엄청난 차별이 있어 아랫것들이 말을 안들어 쳐먹기 일쑤였다.
빙빙 돌던 그가 음보蔭補, 곧 말이 특채지 실은 빽을 써서 공직에 처음 진출한 때가 1786년, 50세 때였으니,
마침 젊은 시절 호형호제하며 지낸 유언호兪彦鎬(1730~1796)가 과거에 수석 입격하고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연암을 끌어주어 그해 선공감역繕工監役 자리 하나 얻으니
이게 아마 몇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단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다가 3년 뒤인 1789년, 53세에 평시서平市署라 해서 물가 담당 기관의 주부主簿로 승진했으니 이 자리가 종6품이라 한다.
이듬해 같은 직급 사복시주부로 발령났지만 나 안 해 하고 뛰쳐 나오고,
그라마 사헌부감찰 주께 했지만 역시 나 안해 해버린다.
그러다 같은 직급 제릉령齊陵令에 임명되자 이건 아무일도 하지 않고 탱자탱자하는 좋은 자리라 해서 냉큼 받는 기이한 행태를 보인다.
그러다가 1791년, 55세에 종5품 서울시 과장급 정도에 해당하는 종5품 한성부판관이 되었다가
뭐 모함을 받아 강등되었다고는 하지만 암튼 그해 겨울 지금의 경남 거창 땅, 김천 인근 안의현감으로 강등된다.
종6품 도로묵.
뭐 조선시대 이런 강등은 워낙 흔해서 새로울 건 없지만,
이러고도 계속 공무원 생활을 이어간다는 사실이 신이하다.
1796년, 60세에 안의현감 임기를 마치고 귀경했다가 다시 제용감주부가 되었다가 의금부도사로 전보한다.
이듬해 7월 종4품 면천군수로 승진 임명되니 이제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다.
하도 집안이 좋아 곳곳에 그의 친인척들이 고관대작으로 포진한 덕도 톡톡히 봤다.
1800년, 64세,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고 두 달 뒤인 8월 양양부사로 승진한다.
실은 이것이 마지막 관직이었다.
이듬해 봄, 느닷없이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1805년, 10월 20일, 가회방 재동 집 사랑방에서 향년 69세로 훅 간다.
당시 양양부사 품계가 어찌되는지는 모르겠다.
대도호부사가 정3품, 도호부사가 종3품이라 하니, 거의 당상관 턱밑까지 추격한 것이다.
이 점에서 같은 음직으로 나갔다 하더라도, 이런 고위직 진출은 무관이나 다른 서얼 출신들은 매우 버겁다는 점에서 정통 양반 벌열가 적자라는 혜택을 상대적으로 많이 누렸다 해야겠다.
부사 바로 위 상관이 정2품 관찰사나 종2품 순찰사니, 빽으로 진출한 사람 치고는 상당한 고위직까지 진출한 셈이다.
이건 뭐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1편은 끝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