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1860년대까지도 노비 수백명을 부린 어느 명문가

신동훈 識 2025. 9. 2.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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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바처럼 19세기 들어오면 

대개의 경우 소농질서로 재편되어 한 마을에 유학이 급증하는 등

계급해방의 징후가 매우 뚜렷해지는데

이런 것도 동네마다 차이가 있어서 

매우 높은 신분의 양반이 살던 동네에는

1860년대까지도 한 호 당 노비가 100명 이상 사역하여 

그런 일족의 호가 10여 가는 모여 있는 듯한데 

노비의 수가 필자가 보기엔 줄잡아도 800-1000명은 되어 보인다. 

이런 마을에는 대개 신분 해방도 없다. 

신분 해방이라는 것도 만만한 고만고만한 양반들이나 

양반호소자들이 모여사는 동네에서나 쉽게 되는 것이지

제대로 된 양반들 사는 동네에서는 이것도 쉽지 않았음을 알겠다. 

1860년대면 바야흐로 미국에서 노예해방 문제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되 

그 나라에서는 아무리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사람은 노예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라도 심심찮게 나왔는데

여기는 1860년대에 수백 명 노비를 문중에서 부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노비를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대부가 단 한 놈도 없었다. 

그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겠는가? 

조선의 망국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

남에게 책임 돌릴 필요도 없다. 


공자님이 언제 노비 수백명씩 데려다 부려 먹으라고 했냐.



*** [편집자주] ***


세상이 저리 돌아가는 데도 선각자 하나 없었다.

조선의 멸망이 외세 탓? 웃기고 자빠졌네.

저절로 망한 것이며 망해야 하니 망한 것이며 망할 만 하니 망했을 뿐이다.

우리 손에 망했어야 한다?

우리 손이건 남의 손이건 망하는데 무슨 폼새 따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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