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19세기에 왜 민란이 폭증하나

신동훈 識 2025. 7. 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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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18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호적만 해도 엄청난 변화가 있다. 

아직까지도 노비 사역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집집마다 4-5명의 노비를 데리고 있던 것이 18세기 전반. 

많게는 20명씩 노비를 거느린 집도 드물기만 하지만 보이는 시대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노비는 한 집에 1-2명 정도로 축소되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딸과 노비 한두 명으로 이루어진 집이 보편화 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이 필자가 볼 때 지주 전호제가 보편화하는 시기다. 

소작농이 보편화하는 시기다. 

18세기 전반만 해도 노비 사역이 주류라 

소작농이 보편화 할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소작농이 향촌에서 보편화하는 시기는 영정조 연간이다. 

그 이전에는 노비사역이다. 

서양사로 본다면 노예제와 농노, 예농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지주전호제는 이와 다르다. 

소작농이건 뭐건 어쨌건 독립적 가구를 형성하고 있어야 지주 전호제가 성립되고 보편화하지 

노비가 집집마다 5-20명씩 되는 단계에서는 지주 전호제가 보편화 하기 어렵다고 본다. 

한국사에서 소작농과 지주가 보편화 하는 시기? 

필자 생각에는 18세기 후반이 아닐까 하며, 

이 계급 갈등이 폭발하는 시기가 19세기부터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 소작농이라는 것. 

엄청난 전통과 역사를 가진 것 같지만

정말 그렇게 오래된 역사를 가진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싶다. 


1935년 조선 농장 소작농 단체사진이라는데, 무슨 단합회라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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