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대, 여러 명이 말하던 민족개조론
춘원은 30년대 말의 행보로
이전까지 소급해서 욕을 먹고 있는 측면이 강한 듯 한데,
사실 춘원이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당시 (1922년)
이 주장을 한 사람은 춘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었음은 당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예 특집기사를 만들어
여러 명이 연재하거나
아니면 외국인에게 한국인의 결점, 고칠점을 이야기해 달라 하여
그것을 정초의 신년 기사로 싣거나 하기도 했다.
이런 경향이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꽤 보인다.
아마 춘원처럼 30년대에 변절의 혐의가 생겼다면
이 사람들도 덩달아 모두 소급하여 욕을 먹었을 것이로되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양반들은 대개 춘원처럼 인생 마무리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신문 사회면은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운동하는 이들이
폭탄을 던지거나 무장 항전하고,
경찰이 독립운동을 진압했다는 기사가 줄줄이 나오던 때라,
우리가 생각하는 바 "독립운동가와 일제 군경이 난투하는"
그런 시대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건을 굳이 다 보도하는 당시의 동아일보가
어떤 악의에서 그런 기사를 준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기사를 읽어본 필자의 소회로는
1922-1925년 사이에 우리 민족의 고쳐야 할 점 같은 기사는
이런 사회면 기사에 뒤섞여
그런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 는 정도로 읽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반드시 이런 이야기 한 사람들이 후일 변절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되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에 우호적인 외국인에게 굳이 찾아가 물어본 기사도 있다).
그의 평생의 업적을 생각해 보면
인생 마무리가 너무 비참했다는 점에서
춘원은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
저 무렵 외솔 최현배도 민족개조론을 들고 나온다.
원시 후진 미개를 쓸어버리자, 조선 민족 갱생更生의 도道를 향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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