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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영원한 우상 한태동 선생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8. 17.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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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환갑을 코앞에 둔 내가 직접 만나 겪은 사람 중에 천재라는 느낌을 준 분은 딱 이 분뿐이다. 

한태동. 

일반에는 덜 알려졌지만, 연세대 신촌캠퍼스 출신들한테는 신화적인 존재다. 

왜 신화적인가?

첫째 그 천재성.

그는 무불통지였다. 그의 공식 연구자 직함은 연세대 신학과 교수였다. 

물론 소속 단과대나 학과 강의에서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는 재학생들한테 신학을 강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예수 믿으라 한 적 한 번 없다. 

그의 교양 강좌는 언제나 500명 이상이 찼다.

기독교 계열 학교라 채플을 진행하는 대강당이 따로 있었으니 그의 강좌는 언제나 이 대강당이었으며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는 강연은 삼라만상을 다 커버했으니 하루는 훈민정음을 강연했다.

음성학을 기초로 하는 강연이었는데 그 강연 내내 나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했다.

말로만 듣던 천재. 그가 바로 선생이었다.

것도 신학과 교수라는 분이. 

저 시대는 한태동의 시대였다.

비슷한 시대 저런 강연으로 신촌 캠퍼스를 수놓은 양대 산맥이 사학과 김동길 선생과 더불어 한태동 교수셨다. 

마광수 김용옥은 잽도 되지 않는 묵직함을 장착한 분이셨다.

둘째 인품.

천재성은 인품과 양립하기는 힘들지만, 선생은 예외였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누가 찾아가건 언제나 환한 언굴로 사람들을 맞았다.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그는 언제나 연세대 출신자들한테서는 다시 보고 싶은 스승 언제나 넘버원 자리를 차지했다. 

그에게서 더욱 놀라운 점은 보직 전문교수라는 대목이다.

이 점이 놀랍기 짝이 없다.

보직 전문 교수들은 거개 정치 성향이 짙고, 공부랑은 담 쌓기 일쑤지만 선생은 달랐다.

그는 신학과 교수로로 할 만한 보직은 거의 다 해 봤을 것이다. 

그렇게 잦은 보직에도 선생은 끊임없이 연구했다.

신학 분야는 모르겠으나 훈민정음, 혹은 음성학 같은 데에 천착했으니 참말로 묘한 선생이셨다. 

그는 192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지금 언뜻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유명한 임정 간부셨다.

그래서 임정 사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는 분이셨다.

선생한테서 개인적으로 들은 임정 일화가 더러 있는데 개중 하나는 워낙 폭발력이 커서 차마 공개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잘 알려져 있기는 하나 임정 그 부패상에 진저리를 쳤는데, 선친의 말씀이라며 오직 단재 신채호만큼은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1956년 프린스턴신학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이듬해 연세대 신학대에 자리잡은 그는 정년퇴임까지 내리 연세대에서 봉직했다. 

그의 교수 이력에서 한국고고학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는 사학과 손보기 선생과 아주 절친했다.

나이는 손보기 선생보다 주민등록상은 두 살 적었지만 이 세대 두 살은 친구라, 실제 친구처럼 지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사석에서 손보기 선생을 말씀하실 때는 손보기 손보기 했다. 

1964년 손보기 선생이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을 때, 학교에서 왜 반대가 없었겠는가?

더구나 그때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을 시절이 아니라 학교 자체 예산으로 조사를 해야 했으니, 저 조사 발굴에 수행하는 모든 예산을 학교에서 타다 쓸 때다.

당시에는 고고학이 생소할 때라, 더구나 손보기 선생은 고고학 전공자가 아닌 조선시대 전공자였으니, 그런 그가 느닷없이 발굴을 하러 간다는데 왜 학교에서 반대가 없었겠는가?

이런 그를 전폭으로 밀어준 이가 바로 한태동 선생이셨다.

석장리 초기 발굴에 한태동 선생이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그는 당시엔 연세대 총장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팎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용재 백낙준을 모시고 구석기 현장으로 내려가 조사단을 격려하기도 했다. 

연세대 구석기학 그 숨은 실력자 혹은 후원자는 바로 선생이셨다. 

내가 기자로 투신해 연세대를 출입한 96년 무렵, 선생을 따로 찾아뵐 일이 있었고, 그 이후 문화부로 전직해 문화재 분야를 전담하던 초기에도 선생을 뵐 일이 있었다. 

당시 선생은 연세대 후문 쪽 사가에 계셨는데 퇴직하신지 이미 한참이라, 요즘 뭐하며 보내시느냐 했더니 손주랑 책 태우는 재미로 산다 하셨다. 

당신 소장 도서를 한 장 한 장 째서 그걸 손주랑 불에 붙여 태우는 그런 놀이를 하고 계신다 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 있다고 껄껄 웃으셨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선생을 소재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연세대인들한테는 영원한 우상이다.

선생이 2025년 8월 16일 향년 101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해도 그 빛은 더욱 발하리라 본다. 

선생이시어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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