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狂馬 마광수와 장미여관, 그리고 올림픽여관
마광수는 인간이면 누구나 탑재한 변태를 변태가 아닌 정상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그의 전법은 폭로였고 대면이다.
그와 동시대를 산 다른 이들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점잖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려 한 그 적나라한 욕망, 인간이면 누구나 지녔을 그 욕망을 그는 그대로 노출했다.
내가 신촌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때, 한창 젊은 국어국문학과 교수 마광수는 '즐거운 사라'를 발간하기 전이었지만,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그 시절 막 발간했다고 기억하니,
실제 서지사항을 보니 1989년 자유문학사 간이다.
이 무렵 나는 평택 미군부대서 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시집을 정식으로 통독한 적이 없다.
오다가다 한두 편 긁적거렸을 것이로대 그렇다 해서 그 이전 보들레르가 나한테 준 충격을 넘을 수는 없었다.
다만 저 시집은 그 제목을 두고 많은 말이 있었으니, 그 무대인 장미여관은 실존하는 신촌의 여관이었던 까닭이다.
그때 신촌의 거의 모든 여관은 포르노를 상영했으니, 장미여관이라 해서 평지 돌출이나 이례異例일 수는 없었다.
저 시집이 나한테 가한 충격파가 크지는 아니하나 그가 그토록 상찬한 장미여관이 어떤 곳인지 현지답사를 감행하기도 했다.
하긴 뭐 그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가 본 적은 있으니 말이다.
돌이켜 보니 내 장똘뱅이 기질은 ㅈ저 장미여관이 상징하는 그 무엇에 있지 않나 상상해 보기도 한다.
다만 그 시절 우리한테는 장미여관이 그리 인기는 없었으니
우리가 애용한 데는 그 인근 언덕 후미진 곳 올림픽여관이나 일동장여관이었다.
숙박명부엔 언제나 우리 은사님들 함자를 썼다.
고마우신 은사님들이다.
(2017년 9월 6일 글을 약간 손보아 전재한다. 저 무렵, 저날 왜 마광수 선생 관련 논급을 했냐 지금 살피니, 그가 바로 전날 2017년 9월 5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타계한 까닭이다.
다른 지식인들이 민주를 팔아먹을 때, 마광수는 본능과 변태를 팔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