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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이 전쟁을 아시나요? 그 뒤에 숨은 진짜 바케스 쟁탈전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9. 11.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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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모데나군대Modenese troops가 경쟁 도시 볼로냐에서 빼앗은 양동이를 들고 있는 양동이 전쟁War of the Bucket 모습. 사진 제공: 볼로냐 역사 박물관

 
양동이 전쟁: 중세 전투 하나가 우리에게 역사와 신화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by 케네스 바틀릿Kenneth Bartlett, The Conversation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속담인 "Se non è vero, è ben trovato"(사실은 아니더라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인류 역사의 많은 부분을 반영한다.

이러한 다채로운 사건 중 하나는 14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와 모데나 사이에서 벌어진 양동이 전쟁War of the Bucket이다.

수년간의 긴장 끝에 모데나Modena 사람들이 볼로냐에 진입해 마을 우물에서 양동이를 훔쳤다는 이야기다.

볼로냐 사람들은 양동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모데나 통치자는 거부했고, 전쟁이 발발하여 1325년 차폴리노 전투Battle of Zappolino에서 모데나의 승리로 끝났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과연 사실일까?

실제로 두 도시는 12세기 초부터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을 특징짓던 이념적 분열의 양측에 있었다.

갈등의 근원은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과 교황청papacy을 대립시킨 유럽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겔프파Guelphs와 기벨린파Ghibellines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이탈리아는 주변국을 희생시키면서 영토를 방어하려는 소규모 국가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와 같았다.

도시 국가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수호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하지만 이처럼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시대에 통치권을 부여할 권력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한 세력은 신성 로마 황제였다.

그는 서기 800년 성 베드로 대성당 St. Peter's Basilica에서 샤를마뉴Charlemagne 대관식 이후 고대 로마 제국의 권위를 주장했다.

다른 세력은 교황이었다.

그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로마 제국의 권위를 합법적으로 수혜한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기독교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지배권을 주장했다.

교황청의 법적 주장은 역사상 가장 큰 위조 문서 중 하나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Donation of Constantine에 근거했다.

이 문서는 로마 최초의 기독교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기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 옮기기 전 교황 실베스테르Pope Sylvester 1세에게 발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서는 황제의 나병을 치료하고 서방에서 라틴 기독교 제국을 이끈 그의 역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황에게 완전한 제국의 권한을 부여했다.

8세기 이전에는 이 기증서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지만, 널리 받아들여졌다.

15세기 중반 이탈리아 학자이자 사제인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가 문헌 분석을 통해 위조임을 밝혀내기 전까지는 위조로 판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문서는 16세기까지도 여전히 언급되었으며, 바티칸 사도궁Apostolic Palace의 살라 디 콘스탄티노Sala di Costantino (콘스탄티누스의 방Hall of Constantine)에도 기록되었다.

교황청에 궁극적인 권위를 부여한 이들은 겔프(Guelph)라고 불렀데, 이는 벨프 가문(House of Welf)의 이탈리아어식 표현으로, 황제 자리를 노리는 자들을 좌절케 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이들은 기벨린(Ghibellines)이라고 했데, 이는 독일어 단어 '바이블링겐(Waiblingen)'의 이탈리아어식 표현으로, 12세기 교황청에 가장 큰 위협을 가한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문의 성과 전투 구호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이념적 분열은 단순히 서로 다른 주권 개념의 추상적인 반영이 아니었다.

계급, 지리, 사건, 그리고 기회에 따라 결정되는 실질적인 분열이었다.

적이 겔프파라면 기벨린파였고, 반역자가 기벨린파 경쟁자를 전복하면, 그는 자신이 겔프파라고 주장하며 도시 안팎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양동이 전쟁

겔프파와 기벨린파 사이의 이 갈등이 양동이 전쟁의 진짜 쟁점이었다.

볼로냐는 겔프파의 주요 도시였으며, 이후 교황령 일부가 되어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지켰다.

모데나는 이탈리아에 진입하여 지지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지원에 의존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분열의 경계에 있는 두 도시로서 긴장은 불가피했고, 이는 훔친 양동이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깊고 위험했다.

전쟁의 훨씬 더 유력한 원인은 양동이 도난 사건이 아니라, 1325년 9월 모데나가 볼로냐의 몬테벨리오Monteveglio 요새를 함락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볼로냐 방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배상을 요구할 명분이 되었다.

수년간의 국경 침공 끝에 몬테벨리오 함락은 결정타였다.

두 도시와 그들의 상반된 세계관은 갈등을 빚고 있었기에, 작은 승리 하나하나가 축하의 대상이 되었다.

1325년 11월,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모데나 군대가 차폴리노Zappolino에서 볼로냐 군대와 맞붙었다.

교황은 모데나 군대 지도자를 파문하고 신에 대한 반역자로 선언했다.

볼로냐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대부분 훈련받지 못한 상태였고, 모데나 군대는 황제가 파견한 전문 독일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모데나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볼로냐 군대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승리는 종종 대중적인 신화로 만들어지는데, 양동이 이야기가 그 중 하나였다.

이 양동이는 전투 전이 아니라 전투 후에 가져갔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리고 그 상징성은 시인 알레산드로 타소니Alessandro Tassoni가 모의 서사시 "La Secchia rapita"를 창작하면서 17세기에 체계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믿는다.

모데나에서는 시청에 원본 양동이가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고, 대성당의 기를란디나 탑Ghirlandina Tower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수 세기 동안 원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역사와 신화는 종종 서로 다른 서사 기법일 뿐이며, 둘 다 국가적 자부심과 결속력을 고취하고 한 민족을 특징짓는 사건들을 기념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양동이 전쟁의 의미다.

진정한 명분을 가진 실제 전쟁이었던 양동이 전쟁은 이제 멀지만 잊혀지지 않는 조상들의 매력적이고, 믿기 어려울 만큼의 행동으로 특징짓는다.

Provided by The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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