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시대부터 로마 제국까지: 어린이 무덤, 키스하는 조각상, 그리고 800점 고대 유물

고고학자들이 파드칼레Pas-de-Calais 주 뤼야울쿠르Ruyaulcourt에서 800점이 넘는 유적을 발굴했다.
이에는 철기 시대 농경지, 로마 시대 가옥, 금속 제련 활동 흔적, 그리고 키스하는 조각상이 안치된 1세기 어린이 무덤이 포함된다.
프랑스 북부에서 진행된 대규모 고고학 발굴을 통해 거의 천 년에 걸친 농촌 생활의 놀랍도록 상세한 모습이 드러났다.
프랑스 국립예방고고학연구소(INRAP)가 센-노르 유럽 운하Canal Seine-Nord Europe 개발 사업 일환으로 진행한 파드칼레 발굴 현장은 13.2헥타르에 걸쳐 있으며, 800점 이상 고고학적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들은 철기 시대부터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농업 방식, 정착지 조직, 장례 풍습, 그리고 경제 활동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농촌 환경
발굴지는 두 개 마른 계곡dry valleys 사이에 있는 자연적인 고지대에 위치한다.
하나는 현재 북운하Canal du Nord가 흐르고, 다른 하나는 현대 도로가 지나간다.
이러한 유리한 위치는 수세기 동안 인간 활동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북동쪽과 남서쪽에 각각 여러 개 울타리로 둘러싸인 주요 거주지를 확인했으며, 각 울타리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 흔적이 남았다.
인간 존재 흔적은 후기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최초로 명확하게 구조화한 정착지가 등장한 것은 라 테네 시대La Tène period(기원전 400년경~기원전 30년경)다.
이 초기 농경 공동체는 도랑으로 둘러싸인 구획을 이용하여 토지를 관리했는데,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다양했다.
초기에는 곡선형이었던 반면, 후기에는 직선형이나 사각형 형태가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토지 이용 전략과 사회 조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 생활과 저장 시스템
여러 증거에 따르면 이 초기 거주민들은 농목업 활동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유적 중 하나는 깊은 저장 구덩이, 즉 사일로silos였다.
지름이 최대 2미터, 깊이가 1.5미터에 달하는 이 구조물은 처음에는 작물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곡물 저장고들은 대부분 쓰레기 매립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보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도기 조각, 동물 뼈, 그리고 가정 및 공예 활동과 관련된 실용적인 물건들을 발굴했다.
그중에는 직물 생산을 시사하는 직조추loom weights와 방추차spindle whorls, 그리고 가죽 세공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금속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거 구조물은 침식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이러한 증거들은 정착지의 근간을 이루는 소규모 자급자족 농경 단위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마의 재편과 확장
기원후 1세기 초, 로마의 영향 아래 이 정착지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남서쪽 지역에서는 기존의 울타리들이 버려지고 보다 규칙적인 사각형 형태 주거지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재편은 거주 밀도증가와 맞물려 더욱 체계적이고 생산적인 농촌 경관을 형성했음을 시사한다.
건축물 유적은 드물지만, 몇몇 발견은 영구적인 거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강화한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실과 그 근처의 우물은 주거 단지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구조물 내부에서 고고학자들은 동전과 고르곤Gorgon을 묘사한 장식품을 발굴했는데, 이는 경제 활동과 로마 세계로의 문화적 통합을 모두 반영한다.
인근 구덩이에서는 사암으로 만든 맷돌sandstone millstones 조각들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는 동물의 힘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어 농업 가공 기술의 발전과 효율성을 보여준다.
바퀴 허브와 금속 부속품과 같은 추가 유물들은 운송 활동과 지역 무역 관계를 시사한다.
장례 풍습과 사회적 통찰
발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서기 1세기로 추정되는 여러 개 매장지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북동쪽 구역에서는 고대 길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8개 화장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화장된 유골은 직사각형 나무 용기에 담겨 있었고, 종종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이 매장지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두 살 미만 어린아이 무덤이다.
이 무덤에서는 서로 껴안고 입맞춤하는 부부를 묘사한 테라코타 인형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이 부모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해석된다.
이 인형은 사후 세계에서의 보호나 동반자 관계를 상징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무덤에서는 작은 도기들이 함께 발견되어, 체계적인 장례 의식이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인근의 또 다른 매장지는 다른 형태를 보였는데, 무덤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가족 단위의 매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장품 종류도 다양했는데, 어떤 무덤에서는 도기가 19점이나 발견된 반면, 다른 무덤에서는 몇 점밖에 발견되지 않아 사회적 지위나 상징적 의미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서쪽 구역에서는 장례 유적이 다소 분산되어 있었지만 무작위로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
매장지는 종종 울타리 모서리에 위치했으며, 개별적으로 또는 소규모로 모여 있었다.
이에는 화장 매장, 항아리, 재와 숯이 담긴 구덩이 등이 포함되었다.
일부 무덤에서는 미니어처 화덕 도구와 같은 상징적인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장례 맥락에서 가정 의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야금 활동 및 자원 이용
이 유적은 또한 서기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야금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공한다.
구덩이와 도랑에서 금속 가공 폐기물인 슬래그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장기간에 걸친 제련 활동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작업장 자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폐기물 양으로 미루어 보아 지속적인 생산 활동이 있었고, 이는 지역 경제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초기 분석에서는 당시에는 비교적 드물었던 석탄이 연료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의도적인 자원 관리 전략이나 삼림 감소와 같은 환경적 요인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후기 거주와 장거리 교역
서기 4세기경, 정착지는 공간적 범위가 축소되고 건축물 수가 줄어드는 등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이 시기에도 거주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유물에는 동전, 브로치, 도구와 같은 금속 유물뿐만 아니라 창촉이나 양모 빗과 같이 북유럽, 특히 독일이나 덴마크와 같은 지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는 특이한 유물도 포함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이 유적지가 후기에도 더 넓은 교역망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끊임없는 질문의 현장
뤼야울쿠르 유적 발굴은 고대 갈리아의 장기적인 농촌 발전을 재구성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철기 시대 농업 체계부터 로마와의 경제적 통합, 그리고 최종적인 쇠퇴에 이르기까지, 이 유적지는 변화하는 사회 및 환경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적응을 보여준다.
진행 중인 연구는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춘다.
왜 여러 매장 체계가 동시에 사용되었을까?
이러한 체계는 서로 다른 공동체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양한 사회적 관습을 반영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농촌 정착지는 어떻게 더 넓은 지역 및 경제 네트워크에 통합되었을까?
발굴 후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뤼야울쿠르는 고대 유럽 농촌 생활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