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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가필드 주연 새 영화 '업라이징'에 영감을 준 실제 중세 반란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9. 27.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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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ZVkrhHebz1Q&t=131s

 

by Alex Brown, The Conversation

폴 그린그래스Paul Greengrass 감독, 앤드류 가필드Andrew Garfield 주연 중세 배경 드라마 '업라이징The Uprising'이 올가을 개봉한다.

이 영화는 1381년 영국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Peasants' Revolt에서 영감을 받았다.[농부가 페전트로 표현된 점을 유의하라. 농장주들, 곧 farmers가 아니다. 아래에서 드러나듯 농민이라지만 이들은 농도serfs였다.]

제작사의 시놉시스는 이 반란을 "리처드 2세의 폭정에 맞선 반란rebellion against the tyranny of King Richard II"으로 묘사하며, 가필드가 이끄는 "백성들이 왕의 막강한 권력에 맞서 정의와 생존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세 기록에 따르면 반란군은 리처드 2세에게 충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15세기 런던탑Tower of London에서 시몬 오브 서드베리Simon of Sudbury와 로버트 헤일스 경Sir Robert Hales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


14세기 익명의 기록인 《아노니말 연대기》(Anonimalle Chronicle)는 요크York의 세인트 메리 수도원St Mary's Abbey에서 반란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반란군들 사이에 암호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암호는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는가?[with whom haldes [holds] yow]"였고, 정답은 "리처드 왕과 진정한 평민들과 함께[Wyth kynge Richarde and wyth the trew communes [commoners]]"였다고 한다.

잘못된 답을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 묘사된 반란군의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은 왕에게 그토록 충성스러워 보였을까?

 



반란군의 목표

1381년의 반란은 정부 부패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리처드 2세는 1377년 불과 10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은 주로 숙부인 존 오브 가운트John of Gaunt와 왕실 고문들royal councilors 감독하에 이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 전쟁Hundred Years' War (1337~1453)은 잉글랜드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왕실은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새로운 형태의 세금, 즉 극도로 인기가 없던 '인두세poll taxes'가 5년 동안 세 차례(1377년, 1379년, 1381년) 부과되었는데, 마지막 1381년의 인두세 부과는 반란을 촉발했다.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반란군에 대해 거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익명 연대기(Anonimalle Chronicle)조차도 이 세금이 "정직하게 징수되지 않고, 부유층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징수되어 징수관들collectors이 큰 이익을 챙긴 것 같다"고 기록했다.

 

1381년 농민 반란 당시 리처드 2세가 반란군과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 중세 삽화. 출처: 프랑스 국립도서관



반란군은 왕을 직접 비난하기보다는 이 세금을 횡령한 주변 인물들을 비난했다.

이는 중세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적 전략이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왕의 부패한 고문들을 비난했다.

1376년 에드워드 3세 재위 시절 열린 의회에서 여러 사람이 "왕의 허락 없이 왕의 재산과 보물을 빼돌리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381년에도 비슷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익명 연대기(Anonimalle Chronicle)는 반란군이 "왕을 구하고 왕과 왕국에 반역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봉기했다고 기록했다.

반란군은 특정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런던에 있는 가운트 가문의 사보이 궁전Savoy Palace과 그의 가재도구를 파괴했다.

당시 연대기 작가 헨리 나이튼Henry Knighton은 한 반란군이 그곳에서 귀한 은제품을 훔쳤지만, 다른 반란군들이 "우리는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자들이지 강도나 도둑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그 은제품을 불 속에 던져 넣었다고 기록했다. 

반란군은 런던탑Tower of London을 포위하고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이자 잉글랜드 재상chancellor of England이던 사이먼 서드베리Simon Sudbury와 잉글랜드 재무장관treasurer of England 로버트 헤일스 경Sir Robert Hales을 붙잡아 참수했다.

반란군은 이 두 사람이 인두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14세기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St Albans Abbey 수도사 토머스 월싱엄Thomas Walsingham은 반란군이 어떻게 이들을 탑에서 끌어낼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600명 기사와 600명 궁수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반란군이 이들을 사로잡도록 내버려 둔 그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산 자보다는 죽은 자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리처드 왕이 마일 엔드Mile End에서 반란군을 만났을 때, 익명 연대기(Anonimalle Chronicle)에 따르면 반란군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리처드 왕이시여, 부디 어서 오십시오. 우리는 당신 외에는 다른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쟁기꾼ploughman으로 나오는 앤드루 가필드



농노제serfdom 폐지

반란군의 불만은 정부의 부패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농노제serfdom 폐지를 요구했다.

농노들serfs은 영주lords를 위해 땅을 경작해야 했고, 삶에 많은 법적 제약을 받았다.

농노제는 비참한 것으로 여겨졌고, 농민들peasantry의 큰 반감을 샀다. 

반란군은 또한 무법자 처벌 제도outlawry 폐지를 요구했다.

무법자 처벌은 법적으로 누구나 무법자를 죽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가혹한 처벌이었다.

그들은 또한 왕 외에는 어떤 귀족도 없어야 하고, 교회 재산은 교구민들에게 분배되어야 하며, 농노제는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들은 또한 기록물들을 파괴하려 했다.

익명 연대기(Anonimalle Chronicle)는 그들이 램버스 궁전Lambeth Palace에서 발견한 "모든 등록부와 재판소 기록관 두루마리chancery remembrancers' rolls"를 불태웠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은 템플 바Temple Bar를 파괴했는데, 이에는 "변호사들이 보관하고 있던 많은 문서muniments "도 포함되었다. [이걸 보면 임진왜란 때 조선 사람들이 장예원 문서를 불태운 일과 같다.]

젊은 리처드 왕은 반란군 요구 중 상당 부분을 수용했다.

나이튼은 왕이 자신의 대봉인great seal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모든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선언하는 칙령charter을 내렸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된 후, 이 칙령은 "무효화하고, 효력을 잃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결되었다."

반란군은 그다지 많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반란은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많은 지도자가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반란 핵심 지도자 왓 타일러Wat Tyler는 스미스필드Smithfield에서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William Walworth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반란군은 마침내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았고, 그 목소리는 영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인두세는 결국 폐지되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다시는 부활하지 않았다.

이미 쇠퇴하던 농노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출처: The Conversation)

 

***

 

이런 자유와 인권을 위한 쟁투가 동아시아에서는 없었다! 

무엇보다 모든 법률은 의무만 부과했지, 권리를 규정한 데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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